로지피피(RoseyPP) <Aloha Oe>

| 2011. 12. 31. 00:19

첫 트랙 'Hello'는 전자음을 대충 어르고 달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정도.
처음 이 트랙을 듣고는 글렌 체크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이렇게 물러빠진 음악으로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앨범 전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녀의 음악에 대해 시사하는 것이 거의 없는 단순한 인트로 트랙에 불과하다.
진짜는 다음부터다.


타이틀 곡이라 할 수 있는 '고양이와의 대화'는 하우스적인 냄새가 강한 애시드 재즈 넘버다.
곡의 진행, 멜로디의 흐름, 사운드의 사용 등이 애시드 재즈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기에 자미로콰이가 최근 앨범에서 보여준 몇몇 곡의 간결한 버전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코러스 막바지에 삽입된 긴장감을 주는 드럼 비트에서 특히나 이들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곡을 지배하는 박자는 차분하고 사교적인 움직임을 끌어내는 하우스나 라운지의 그것을 채택했고, 장르 특유의 흐릿한 몽롱함과 그녀의 감미롭지도 선명하지도 않은 목소리가 잘 어울린다.
적절히 여성향을 자극하는 고양이라는 소재를 써서 여성들에게 관심과 인기를 보장 받았음은 물론, 그런 취향을 선호하는 남성들로부터의 지지도 이끌어냈다.
곡이 이쯤 되면 치밀한 계산을 통해 절대 패하지 않는 필불패의 솔루션을 작위적으로 뽑아낸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다.
대중적, 상업적인 의미에서, 성공과 패배의 시소 정가운데에 유유하게 누워 시니컬한 하품을 내보이는 고양이 같은 트랙.
왠지 모르게 얄밉고 야비하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이 쪽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일단은 그녀에게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치고 넘어가자.
장기하와 얼굴들의 1집을 듣고도 이와 비슷한 감상이었지만 이내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던 내가 아닌가.

벌써 삐딱해진 마음을 달래고 '어른아이'로 넘어가자.
지난 곡보다 훨씬 더 팝적인 보컬을 들려주는 로지피피.
간결한 송 라이팅에 듣기 편한 보컬 라인을 깔끔하게 얹어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팝을 만들었다.
네 번째 트랙 'Falling in love'는 여기에 한 술 더 떴다.
인트로만 들어도 남자 발라드 가수의 화려하고 부담스러운 R&B 스타일 애드립이나, GOD 스타일의 무시한 듯 내뱉는 랩이 툭 튀어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대중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곡이 진행되면서 터보의 흘러간 사랑 발라드가 연상되기도 하고, 의자라도 너덧개 갖다 놓고 앉았다 일어났다 분주하게 춤 ㅡ 왼손으로 딱딱 소리를 내는 그 특유의 제스처는 무조건 포함되어야 한다 ㅡ 을 추는 흔한 걸 그룹의 흔한 발라드가 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이 닮아 있는 두 트랙에서 대한민국 대중 음악의 트렌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그녀의 주도면밀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그렇게 치밀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http://sports.donga.com/Feed/EnterKisa/3/02/20111012/41033581/2


그렇다.
내 배배 꼬인 마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길, 이어지는 '튤립'은 보사 노바다.
지난 두 트랙보다는 좀 더 노래에 깊이를 주었는데 그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
어떤 음악을 써내든 절대 오바라고는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조심스런 어프로치, 그 음악적 철학이 멋진 결과를 내놓은 좋은 예가 아닐까.
4분의 3박자가 주는 은근한 긴장감을 시작부터 끝까지 잘 유지한 '별과 당신'은 일본 학원물 애니메이션의 TV판 엔딩 곡으로 쓰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서정적이다.
그녀 특유의 감미롭고, 선을 넘지 않는 보컬도 그 서정성에 큰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꽃잎'에선 심심하지 않은 분위기 전환이 일어난다.
아무래도 캐스커 초기 앨범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대목인데, 어떤 면에선 미국의 포크 팝 듀오 스완 다이브가 들리기도 한다.
사실 내가 환상적인 개소리를 나불거린 '고양이와의 대화' 역시 스완 다이브의 사운드가 깊게 배어 있다.
복고적인 사운드가 몽롱하게 청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루루루" 부분을 듣고 있자면 왜 파스텔 뮤직에서 로지피피를 픽업해가지 않았는지 진지한 의심이 든다.
트랙 '어른아이'가 아닌, 진짜 어른아이는 뽑아갔으면서 말이다.

이어지는 'Love fixer'는 마룬 5의 멤버 전원이 게이였을 경우 그들이 만들어냈으리라고 추정되는 음악이다.
훵키한 기타 라인이 곡 전반에 등장하며 분위기를 흥겹게 돋운다든지, 강약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빰빰!하는 비트가 곡 부분 부분 나타난다든지, 맛깔나게 드라이브를 입힌 기타 솔로나, 훅이 있는 멜로디 라인 모두 영락없는 마룬 5의 노래다.
다만 남성적인 매력이 훈제 바비큐의 기름처럼 쭉 빠져 있다는 것이 차이점.
쉬어가는 형식의 'Subiaco'가 지나가면 앨범의 마지막 트랙 'Good bye'가 흘러나온다.
정말 헤어지는 느낌이 물씬 나는 무난한 코드 진행을 지닌 락으로 앨범 전체가 이런 분위기였다면 혹평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 앨범에서는 나름 유니크함을 드러내는 트랙이었기에 마감하는 기분으로 즐겁게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뭐야!
어느 새 배배 꼬였던 내 마음이 마법 같이 다 풀린 게 아닌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일정한 틀을 지키면서도 다양한 배경을 갖는 여러 음악을 부담스럽지 않게 정성스레 포장했다.
손목 시계 줄에 배인 향수의 은근한 내음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뭔가 아련한 느낌을 주는 그런 앨범이란 말이다.
어디 한 번 이 앨범에 대해서 세상 가장 참혹한 비평을 하겠다고 마음 먹어봐라.
막상 앨범을 다 듣고 혹평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그 순간 어느 새 로지피피를 칭찬하는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와!
좋은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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