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태양 731

| 2012. 1. 1. 11:47

새해 벽두부터 올리는 영화가 C급 고어 영화라는 사실은 나의 2012년에 기괴하게 흘러가리라는 그런 예측을 낳지는 않는다.

홍콩판 제목은 '흑태양 731', 영어로는 'Man Behind The Sun', 놀랍게도 우리나라에까지 개봉했던 이 영화의 한국판 제목은 '마루타'다.
포스팅의 제목에선 원제를 사용하고 내용에서 다시 언급할 때는 한국에 개봉한 제목을 쓰던 원래의 방침에 따라 앞으로 이 영화는 '마루타'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예전에 '처녀의 창자'라는 에로 고어물을 보면서 우리가 과연 영화라는 예술의 한 분야의 경계를 어디까지로 정해야 하는지 궁금증이 일었던 적이 있다.
일련의 프레임이 연달아 나오면서 하나의 모션 픽처를 만들어내는 모든 영상물 중에 과연 어떤 녀석들을 영화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강승윤이 만들었던 '노량진의 중심에서 길을 묻다'도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2011년에 제작된 실험 영화라는 타이틀을 쓴 240시간짜리 영화는 대체 어떤 면에서 영화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걸까?
내가 새로 산 갤럭시 넥서스를 이마에 떡 붙이고 하루 종일 녹화 모드를 작동시켜서 나온 결과물에 '왕백수 한결 씨의 일일'이라는 제목을 붙여 영화로 내놓는다면, 과연 다른 사람들 역시 그 결과물을 영화로 인정할 것인가?
예술의 경계를 짓는다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나처럼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사견을 말하자면 나는 '마루타' 같은 영상물 또한 영화에 속한다고 본다.
이 영화 역시 우리가 흔히 보는 다른 영화들과 같은 잣대를 놓고 평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마루타'를 정말 객관적으로 평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 영화의 가치가 거의 0점에 수렴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저기서 맞고 있는 사람은 마루타가 아니다. http://www.theage.com.au/articles/2004/04/22/1082530287330.html


스토리는 형편없다.
솔직히 처음부터 이런 고어 영화에 어떤 스토리를 담는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짬뽕 같은 일이다.
'노틀담의 안드로이드', '맨홀 속의 인어' 같은 작품이 상당히 코믹한 작품이 되어버렸던 이유는 고어 영화라는 뭔가를 담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그릇에 억지스럽게 메시지를 담으려고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다.
이는 조금 더 고품질의 고어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악마를 보았다' 같은 작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처음부터 메시지를 담는 것이 제한된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면 그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도를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마루타'는 그 영화 우리에게 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으나, 그 수단으로 매우 잘못된 것을 선택했고, 그렇기 때문에 형편없는 스토리 라인을 가지게 된 것이다.

혹시나 오해할까봐 한 마디를 덧붙이면, 내가 731부대의 만행과 그 당시 마루타들의 처참했던 현실을 놓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나는 단지 이 영화의 내러티브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면의 연출력은 어땠나.
고어 영화로서 훌륭한 평을 받는 방법으로 훌륭한 연출력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마루타'의 연출력은, 실제 시체까지 가져다가 썼다는 그 노고에 비해서 퀄리티가 매우 떨어진다.
고어함의 현실성이 상당히 떨어지고, 배우들의 연기 ㅡ 모우 툰 페이 감독은 유명 배우가 이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꺼리고 이름이 없는 배우, 또는 배우가 아닌 일반인을 썼다고 했으니 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사람아, 이름 있는 배우가 이 영화에 출연할 것이라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게냐 ㅡ 마저 그 생생함을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AVGN의 제임스 롤프 같은 사람이 마음 먹고 고어 영화를 찍는다 해도 이보다는 더 나은 연출력을 선사했을 것이다.
2005년에 MBC 뉴스데스크에서 '마루타'의 장면을 실제 생체 실험의 영상 자료라고 보도한 적이 있다는데 거참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내가 보기에 '마루타'는 이런 영화다.
이상.

마루타
감독 주흥,전기 (1988 / 홍콩)
출연 왕윤식,왕강,오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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