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

| 2011. 12. 25. 21:23

드디어 '악마를 보았다'를 보았다!


영화를 굉장히 만족스럽게 보고난 뒤, 포스팅에 삽입할 만한 스틸 컷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독 김지운을 앞으로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알겠다는 나의 의견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악마를 보았다'를 실패작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보편성이 결여된 잔혹극으로, 가장 극단적인 천박함을 보여주는 '쎈척'으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로 평가하는 글들을 읽으며 내가 영화를 평가하는 관점이 얼마나 편향적인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영화의 영상미를 굉장히 즐기는 사람이다.
"영화의 영상미"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굉장히 큰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내 능력으로 그 범위를 구체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굳이 몇 가지 키워드로 "영화의 영상미"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말하고자 한다면, 미쟝센과 장면과 장면 사이의 연계성, 신선한 카메라워크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저 세 가지 단어를 하나로 줄인다면 간단하게 기교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데 영화를 볼 때 그것의 기교를 좇는다는 것은 꼭 음악을 들을 때 보컬의 음역대에 집착하거나,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뛰어난 속주 기타리스트인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토론하거나, 드러머의 실력을 1초에 치는 스트로크의 수로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옹졸하고 편협한 일이다.

내가 최소한의 생각을 가지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 지 이제 5년차에 접어들었다.
음악을 들을 때 기교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은 내가 뭔가 의식을 가지고 음악을 듣기 시작한 지 5년째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물론 지난 5년간 상당한 수의 영화를 봐왔던 내가 기교적인 면 외의 다른 영화의 구성 요소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이 내가 영화를 관람하는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한 시기는 아닐까 싶다.

꽉 막힌 사고에 조금 여유를 준다면 신기원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건 그냥 그런 거고, '악마를 보았다'는 매우 잘 만들어진 영화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에 대한 평이란 그 대상의 특성에 탄력적으로 맞추어 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대문 구제 시장에서 파는 청바지와 명품 아울렛에서 파는 정장 바지를 같은 기준에서 판단하는 것은 실수다.
나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감독 김지운이 관객들에게 그 파격적인 영상미와 스토리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찾을 수 없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내게 있어 단순히 조금 끔찍한 액션 스릴러요, 범죄 심리극일 뿐이었다.
굳이 이 작품에서 그 외의 다른 요소를 복잡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미 '악마를 보았다'는 단순한 액션 스릴러와 범죄 심리극으로서 최고의 수준에 올라 있는데 말이다.

'달콤한 인생'에서 보여주었던 김지운의 패기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거대한 패기에 짓눌려 손발에 땀을 쥘 수밖에 없었다.
발바닥에 이렇게 많은 땀을 흘려가며 본 영화는 내가 살다 살다 진짜 처음이다.
격투 장면이 주를 이루지 않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달콤한 인생'의 화려한 카메라워크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사람의 신체에 대한 사실적이고 노골적인 묘사, 그리고 괴물도, 귀신도 아닌, 진짜 "악마"적인 사람들의 심리를 생동감 있게 표현해낸 것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엔 진짜 욕이 나올 정도로 멋진 연기를 보여준 최민식의 공이 크다.
'올드보이', '파이란', '꽃피는 봄이 오면', '주먹이 운다', '해피 엔드' 따위의 영화로부터 배우 최민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던 나는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을 보고 앞으로 그를 존경하기로 마음 먹었다.
수줍게 고백하는데, 최민식 씨, 정말 존경합니다.

아, 지릴 것 같다. http://sidecat.tistory.com/47


장면 장면에서 '데드 캠프', '검은 집', '추격자', '박쥐' 등이 떠오른다.
물론 저 네 영화보다 '악마를 보았다'가 더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는 바.
나는 '악마를 보았다'의 주제를 사형(私刑)의 정당성으로 보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케빈 베이컨 주연의 '데스 센텐스'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토록 처절한 복수가 끝날 무렵 사형의 집행인과 원래의 범죄자가 완벽히 동질화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누군가 보았다는 그 악마는 대체 누구인 것일까.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미녀에 대한 정보를 하나로 모아 이 포스팅에 물 타기를 시도하려고 했으나 이미 누군가 그 수고로움을 대신한 것을 발견했다.
그래, 내가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미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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