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net Terror

| 2011. 12. 18. 09:02

'데스 프루프' 특유의 느낌을 까먹을까봐 부랴부랴 '플래닛 테러'를 보았다.
'플래닛 테러'의 주요 소재는 좀비인데, 쿠엔틴 타란티노의 단짝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영화답게 좀비 영화에 끼워넣을 수 있는 보너스란 보너스는 전부 다 넣어서 매우 즐겁고 유쾌한 블랙 코미디 고어 좀비 영화를 만들어냈다.

나의 취향에 따라 두 영화의 우열을 가리자면 '데스 프루프'보다 '플래닛 테러'의 손을 들고 싶다.
애매하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내 기준에서 '플래닛 테러'가 '데스 프루프'보다 앞서는 점이, 반대의 경우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플래닛 테러'를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두 가지다.

1. 개그

'플래닛 테러'는 어떤 의미에서 오로지 블랙 코미디라는, 5음절 2어절의 장르에 속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작부터 5분까지 난무하는 빌어먹을 블랙 위트에서 웃음보가 터져나오지 않는다면 그 뒤로 이어지는 영화 전반의 개그 코드와 자신의 취향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되므로 그냥 영화 감상을 그만 두자.
있지도 않은 회사 로드리게즈 인터내셔널 픽쳐스(Rodriguez International Pictures)의 약자를 따서 R.I.P.라고 해놓고는 묘비 모양의 트레이드 마크를 내세우는 것이나 '마체트'의 고리타분한 냄새가 나는 트레일러를 보면 노골적으로 관객의 웃음보에 싸대기를 때려주겠다는 로드리게즈의 의도가 선명히 드러난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해서도 간간히 등장하는 시니컬한 개그들은 영화의 감칠맛을 돋운다.
개그의 소재나 수준이 절대 높은 것은 아니다.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영화 중간중간에 별 시덥잖은 꼬투리를 잡아서 관객을 웃기려고 드는데, 문제(?)는 그게 웃기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선택의 여지없이 웃게 된다.
진지해도 웃기고 진지하지 않아도 웃기다.

중반부로 접어들면 이 소소했던 개그감이 한꺼번에 폭발한다.
'기쿠지로의 여름'이 영화의 중간 부분에서 일찌감치 클라이막스를 찍고 후반부에 미친 듯한 코미디를 선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로즈 맥고완과 프레디 로드리게즈의 베드신에서 나무 다리의 클로즈 업 ㅡ '데스 프루프'에서 이런 기가 막힌 위트는 없었다 ㅡ 갑자기 '엘 레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는 프레디 로드리게즈의 총 돌리기, 밑도 끝도 없이 등장하여 '엘 레이'의 이동 수단이 되는 미니 바이크, 쿠엔틴 타란티노의 갑작스런 등장, 화면 옆에 곁다리로 등장하는 WiP[각주:1]식 영화의 가짜 예고편 등.
여기에 마지막 피니쉬로 다리에 총을 꼽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플래닛 테러'의 개그는 화룡점정을 찍게 된다.

도대체 이 아저씨의 머리 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영화의 수준을 평가할 때 그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웃음의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이치에 맞는 행동은 아니지만 '데스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라는 두 영화를 비교할 때는 비교의 잣대로 사용하기에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여러가지 다양한, 그러면서도 질 좋은 웃음을 시작부터 끝까지 선사하는 '플래닛 테러'의 압승.

2. 여자

결론부터 짚어가면 역시나 '플래닛 테러'의 승리다.
'데스 프루프'에서 짧게 지나가는 두 여자 ㅡ 첫 이야기에서 데스 프루프 차 안에 갇혀 끔찍한 상처를 입고 마침내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바깥으로 날아가는 그녀와 병원에서 투덜거리던 정복 차림의 그녀 ㅡ 가 주연급으로 나오는 '플래닛 테러'는 더 예쁜 여자, 더 빵빵한 여자를 캐스팅했다는 애초부터의 어드밴티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여자' 부문에서 승리를 거둘 자격이 충분하다.

우선 "애초부터의 어드밴티지"부터 이야기하자.
좀비들에게 다리를 뜯겨 허벅지에 철심을 박았다가 목제 다리를 얻었다가 그 뒤에는 M4를 끼웠다가 마침내는 기관총을 끼게 되는 로즈 맥고완(Rose McGowan)과 양 손이 마비되어 애를 먹다 후에 강한 여전사의 모습을 보이는 말리 쉘튼(Marley Shelton)은 상당히 뭇남성들의 눈을 흐뭇하게 만드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

로즈 맥고완(Rose McGowan). http://www.webwallpapers.net/08/129-rose-mcgowan-wallpaper/free-wallpaper-8-2


말리 쉘튼(Marley Shelton). http://www.listal.com/viewimage/311422h


잠시이기는 하지만 스테이시 퍼거슨(Stacey Ferguson), 우리에게는 퍼기(Fergie)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블랙 아이드 피스의 여보컬도 등장한다.
'트랜스포머'의 풋풋했던 ㅡ 그러나 가슴만큼은 풋풋하지 않은 ㅡ 메간 폭스를 연상시키는 화끈한 자동차 정비 신이었다.

http://www.allmoviephoto.com/photo/2007_grindhouse_pt_010.html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여조카들도 탄력 있는 허벅지를 보여준다.
일단 라인업 자체가 다르다.
갈락티코 시절의 레알 마드리드에 비기기는 힘들지만 이 정도면 요새 빌빌거리는 첼시 수준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캐스팅과는 무관하게 '플래닛 테러'는 '여자' 부문에서 승리다.
승리의 이유는 여자라는 생명체를 야시시하게 찍는 촬영술에 관한 것으로, 쿠엔틴 타란티노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실감나는 차량 추격 신을 찍는 동안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여자의 몸을 아름답게 찍는 것에 전념했던 것이다.
'데스 프루프'의 랩 댄스 장면이 생각보다 별 감흥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자를 카메라에 담아내는 능력은 로드리게즈가 타란티노보다 한 수 반에서 두 수 위라고 추정할 수 있다.
굴곡과 감촉과 질량감을 동시에 포착하는 것, 조명과 그림자와 촬영 각도를 조절하는 것은 아무나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상이 '플래닛 테러'의 승리 이유.
조쉬 브롤린과 브루스 윌리스의 역할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가운데, 커트 러셀의 뛰어난 사이코패스 연기와 조이 벨의 초인적인 스턴트 연기가 있었던 '데스 프루프'가 배우의 연기 면에서는 더 좋았다.
박진감 넘치는 전개 역시, 조금은 김이 새는 '플래닛 테러'보다 '데스 프루프'가 더 흥미로웠다.

하지만 '플래닛 테러'가 자랑하는 '개그'와 '여자'를 이기기엔 역부족이다.
제작 과정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와 수없이 많은 콜래보레이션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위키피디어에는 감독, 연출, 각본, 음악, 촬영, 게다가 스튜디오에도 일부 자기 이름을 올린 로버르 로드리게즈의 원맨쇼가 돋보이는 영화다.

두 영화가 더블 피쳐로 묶인 '그라인드하우스'가 기대에 못 미치는 흥행 성적을 올린 것은 의외였다.
비록 내가 '플래닛 테러'를 더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데스 프루프' 역시 아주 유쾌하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기 때문이다.
'킬 빌'과 '신 시티'의 고어(gore)를 이겨낸 사람들이 '그라인드하우스'의 고어에 질렸을 리는 만무한데 만약 그렇다면 앞의 두 작품과 비교해 매우 떨어지는 진지함에 대한 반항 심리나 일반적 취향과는 맞지 않는 개그 코드에 대한 분노가 형편없는 실적에 한 몫 했으리라.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즈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개그를 매우 좋아할 것이라는 상관 관계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느낌은 안 드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몇 가지 트레일러를 더 보자고 '그라인드하우스'를 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두 영화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이것으로 모두 해소되었다.
  1. Women-in-prison의 약자로 어떤 공간에 갇혀 있는 여성들에 대한 가학적인 학대 따위를 다루는 영화. 좀 더 자세한 것이 알고 싶다면 영문 위키피디어 링크를 잠시 읽어보시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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