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용산으로 신병 배치를 받았을 때 사무실에서 필요할 때 쓰라고 준 녹색 스프링노트를 다 쓴 하루였다. 나름 오래 쓰기도 했고 애초에 그 디자인을 맘에 들어했기 때문에 그냥 냅다 버리기 전에 노트의 내용을 죽 한 번 훑어보기로 했다.
이런 게 적혀 있지는 않았다. 아는 사람만 웃을 수 있는 고급 유머.
노트의 첫 부분은 군인일 때 틈틈이 연습하던 노래들의 가사가 적혀 있었다. 덕분에 아주 오래 잊고 있었던 곡을 하나 찾았다. 그 다음 부분엔 2012년 겨울부터 2013년 초까지 잠시 랩에서 일하던 시절의 메모가 있었다. 내게 주어진 프로젝트는 지그비 모듈을 이용한 매우 단순한 무선 통신이었는데 통신이라고는 모르는 학부생에겐 그것조차 만만치 않았던 경험이었다. 지금이야 리눅스 시스템을 어느 정도 만질 수 있으니 그 때보다는 좀 더 수월하게 코딩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여러가지 삽질에 대처하는 방안도 늘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나서 바로 튀어나오는 것들이 지난 여름의 흔적들이었다. 사무실 입주 전의 브레인스토밍부터 아이템 선정 과정, 지금 생각하면 거의 코딩 까막눈이에 가까운 실력으로 스케치한 여러가지 파편들, 입주 전후의 매우 타이트해보이는 계획, 여러가지 자잘한 돈 계산, 서비스 초기의 기획 아이디어들, 여러 포럼과 강의 등을 돌아다니며 받아 적은 그렇게 대단히 중요하지는 않은 정보들, 이유를 알 수 없는 몇 장의 공백, 중간에 준비했던 피버팅(pivoting) 관련 조사 자료들, 프로그래밍 실력을 늘려보고자 새롭게 루비를 공부했던 기록들, 세 번째 피버팅을 준비하며 사람들에게서 들은 여러 컨설팅 정리들, 그리고 지금 외주를 하며 엉성으로 스케치한 각종 숫자들까지.
그간 잊고 지냈던 지난 몇 년의 시간들, 그것도 지난 1년에 아주 집중된 그 시간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아 얼른 노트를 정리해 넣고 일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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