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당시의 현장을 사진으로 남겨둘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으나 당황하지 않고 썰을 풀어볼까 한다.
그나저나 그저께 밤에는 호날두와 셀카를 찍는 꿈을 꿨다. 물론 루니는 등장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는 종종 요리를 해먹곤 한다. 입주 초기에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한 끼 정도를 사무실에서 해결할 만큼 모두의 절약 의지 및 집에서 나와 사는 남자들의 괜한 자존심 등이 셌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무실에서 해결하는 끼니는 질이 그렇게 좋지 않은 편이다. 밥이야 밥솥이 알아서 해주는 거긴 하지만 소형 밥솥이라 잡곡밥을 해먹기에 압력이 부족해 매번 흰 쌀밥을 먹어야 하고, 반찬은 이리저리 그 때마다 사정이 되는 사람이 집에서, 또는 지인에게서 어떻게 알음알음 가져오는 것이 전부였다. 반찬의 대부분은 저장 기간이 충분히 긴 김치나 절임, 포나 멸치, 견과류 종류였다. 시간이 가면서 자연스럽게 사무실에서 밥을 해먹는 빈도가 떨어져갔지만 종종 사무실에 모여 앉아 술을 먹는 모임들이 반비례로 생겨났기 때문에 한 번 요리를 하게 되면 스케일 ㅡ 먹는 거나 나중에 치우는 거나 ㅡ 이 커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빈도 X 양의 값이 상수로 유지되는, 같은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여기서 그만 두도록 하자.
어쨌거나 12월 말에 한 번 친구들이 사무실에 놀러와 술과 고기를 섭취한 적이 있다. 나름 불쌍한 사무실 식구들을 챙겨준답시고 이런 저런 먹을 거리들을 근처 이마트에서 잔뜩 사왔는데 그 때 사무실 냉장고로 같이 딸려 들어온 친구 중에 하나가 작은 팩에 담겨 있는 김치였다. MT 갔을 때 고기와 함께 먹기 좋은 사이즈로 세 팩이 한 봉지에 묶여 있었다. 당시 사왔던 음식의 대부분은 그 날 섭취가 완료되었지만 김치는 그 팩조차 뜯지 않았는데 내가 집에서 가져온 배추 김치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기왕 김치 먹을 거면 새 김치 포장을 뜯기보다는 먹던 김치를 먹자며 새 김치에는 눈도 주지 않았던 것.
김치란 반찬이야 언제든 먹을 수 있고 어떻게든 요리가 가능한 반찬계의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던가. 그렇게 김치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고 그렇게 냉장고에서 머무른 지 어느 새 3달이 넘어버렸다.
지난 밤 출출함을 이기지 못해 라면을 끓이던 나는 먹던 김치가 동이 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런 때를 대비해서 우리가 김치를 남겨 둔 것이 아니냐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냉장고에서 김치 팩을 찾던 나는 바로 그 자리에 펼쳐져 있던 디스토피아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뭐 그렇게 대단히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 광경이 내게 시사하는 바는 《1984》의 배경만큼이나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의 것이었다.
지난 3달 동안 수도 없이 열고 닫힌 냉장고에서 숙성된 우리의 김치 팩은 이미 그 내용물이 쉴 대로 쉬어 있었다. 문제는 김치가 쉴 대로 쉬었다는 사실을 팩을 열어서 냄새를 맡았다거나 맛을 보아서 안 게 아니라는 것에 있다. 유산균의 대사활동으로 만들어진 각종 기체 때문에 그렇게 크지도 않은 김치 팩들이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김치 팩이 당연히 튼튼하기야 하겠지만 저대로 조금 더 외면했더라면 팩이 냉장고 안에서 터지게 되는 처참한 사태가 벌어질 뻔도 했다.
그러나 가위로 조심스럽게 잘라본 빵빵한 김치 팩들의 기압은 그렇게 강하진 않았다. 결과적으로 고작 마트에서 산 김치 팩에서 다소간의 묵은지 맛도 느꼈고 오늘 점심에는 그 묵은지 김치들을 이용해 고등어 김치 조림도 만들어먹었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열심히 살아서 다시는 김치 팩 같은 걸 빵빵한 채로 냉장고에 두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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