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양비디오밴드 - 연희동

| 2015. 1. 7. 14:14

0. 나는 연희동에서 나고 자란 연희동의 사내다.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연희동이라는 터전을 떠나 살았던 것이 크게 네 번이다. 대전으로 내려가 학교 생활을 했을 때, 용산에서 군대 생활을 했을 때, 다시 용산에서 스타트업 사무실을 잡았을 때, 그리고 강남인 듯 강남 아닌 강남구에 원룸을 구한 지금. 여튼 누적 기간으로 20년이 넘게 연희동에서 생활을 한 만큼 동네 자체에 대한 애착은 강한 편이다. 이 포스트는 지난 연말 다시 한 번 연희동을 떠나며 감상에 젖었다 불현듯 떠오른 옛 기억에 작성하는 것이다.

1. 고등학교 시절 소리바다를 애용했던 나는 ㅡ 멘트 없는 음악 방송을 통해 포인트를 모았더랬다. ㅡ 어느 날 무심결에 검색창에 연희동을 쳐봤더랬다. 음악적 소재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이었을까 별 검색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던 어느 순간 검색 결과에 '연희동'이라는 트랙이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그 '연희동'이라는 트랙을 만든 밴드의 이름은 '허양비디오밴드'. 심상치 않은 결과에 무작정 허양비디오밴드의 아마 EP로 추정되는, 이제는 그 이름이 기억도 나지 않는 앨범을 다운로드 받았다.

2. 구글에서 허양비디오밴드를 검색해봤다. 거의 아무런 정보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최상단에 검색이 되는 2000년 6월 1일 아이뉴스의 기사에서 이들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기사를 보니 내가 예전에 찾았던 5개의 트랙은 어떤 EP의 구성물이라기보다는 한동안 난립했던 여러 음악 플랫폼 중 하나에 올라온 일련의 트랙들의 모음인 것 같았다. 뜬금없는 꽹과리 솔로와 "만지고 싶어. 너의 가슴을, 내 손으로." 등의 후렴구가 있었던 트랙 '저까슴'이라든지, "나는 자지, 너는 보지" 등의 후렴구를 가지고 있었던 '자위' 외에 내가 이 포스트에서 다루고자 하는 '연희동'도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다. 밴드의 리더로 추정되는 허한솔 씨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비루한 포스트를 빌어 당신과 당신 팀원들의 음악은 훌륭했으며 아직도 그 음악을 기억하는 열렬한 팬이 하나 있음을 알리고 싶다. 흑흑.

3. 여하튼 내가 기억하는 '연희동'이라는 트랙의 흐름을 기억하는 가사와 함께 소개하면서 포스트를 마친다. 몇 년만에 떠오른 트랙치고 기억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것을 보면 고등학생 이한결에게 이 트랙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를 알 수 있다. 고3 여학생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앞에 내세우나 실제로 가사의 주인공은 그 고3 여학생의 30대 초반의 새엄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소절부터 그 새엄마를 아줌마로 지칭한다. 로리타와 MILF 취향의 남성을 모두 공략하는 기민함을 찾아볼 수 있다.

처음 빨간 팬티를 언급했을 때 바로 기타 솔로를 삽입하며 보통의 리스너들에게 외면 받기 십상인 기타 솔로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전략적인 구성을 노린 면도 엿보이고 열린 결말을 사용해 이 트랙을 반복적으로 듣게 하는 2차적인 효과까지 의도했다. 허양비디오밴드가 꾸준히 활동했다면 꽤나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이제 가사를 보기로 하자.

(가볍고 발랄한 경음악이 흘러나오며 나레이션이 흐른다.)
"(앞에 뭐가 더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모 대학교 화장실에는 다음과 같은 낙서가 있다."

(무겁지 않은 락 리듬과 적당한 장조가 어우러진 반주.)
오늘 연희동에 아르바이트 갔다.
고3 여학생을 가르치는데
새엄마는 30대 초반인데다가(이 부분 가사 불확실) 집에 아무도 없었다.
돌아서는 순간 내 앞에 아줌마~가 서~ 있는 것이다.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는 남자 목소리로)
"발목을 다쳤어요."

(마일스 데이비스 풍으로 한 박자 내려놓는 재즈 반주가 흐르며 남자 목소리로 나레이션)
"나는 아줌마를 부축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여기 무슨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남.) 아줌마의 부드러운 살내음이 느껴졌다."

(드럼의 짧은 필인과 함께 다시 원래의 락으로 돌아온다.)
발목을 주물러 주다가, 발목을 주물러 주다가 미니스커트 안에,
미니스커트 안에 빨간 팬티를, 빨간 팬티를 본 순간!

(경쾌한 클린 톤의 기타 솔로가 이어진다.)

발목을 주물러 주다가, 발목을 주물러 주다가 미니스커트 안에,
미니스커트 안에 빨간 팬티를, 빨간 팬티를 본 순간! 나는!

(보컬은 짧게 쉬고 반주는 이어지며 긴장감 유지, 한 번 반복)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템포가 점점 빨라진다.)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보컬의 숨이 가빠져오면서 클라이막스.)
나는~ 나는~ 나는~ 나는~응아아악~

(모든 소리가 죽고 나서 예의 그 경음악이 다시 나온다. 마치 마리오가 죽었을 때 나오는 뜬딴딴딴따따다 같은 느낌으로. 그리고 나레이션)
화장실에 낙서하지 말자.

(수세식 변기의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나면서 트랙 종료.)

마땅한 짤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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