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2

| 2015. 1. 9. 10:58

이야기의 후반부는 어렵사리 캘리포니아로 넘어온 조드 가의 본격 수난기다. 제대로 되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읽는 이의 심정이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이는 소설 속 서술이 사실성과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뜻일 것이며 이는 다시 소설 속 상황이 당시의 시대상을 적확하게 담아냈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거대한 구조적 모순이 사람들에게 ㅡ 광의로 독자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ㅡ 주는 분노는 책의 제목인 "분노의 포도"가 등장하는 아래 구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 환경이 달라질 기색은 없다. 스타인벡 역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절망의 끝에 다다른 조드 가의 뒷이야기를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단히 애매모호한 엔딩으로 이 길고 긴 소설을 마무리하고 있다. 서평을 읽어보니 바로 이 지점에서 《분노의 포도》가 많은 질타를 받았다고 한다.

고발조차 할 수 없는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 울음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다른 모든 성공을 뒤엎어 버리는 실패가 있다. 비옥한 땅, 곧게 자라는 나무들, 튼튼한 줄기, 다 익은 열매, 그런데 펠라그라를 앓고 있는 아이들은 그냥 죽어 갈 수밖에 없다. 오렌지가 이윤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검시관들은 사망 증명서에 사인을 영양실조로 적어넣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일부러 식량을 썩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강에 버려진 감자를 건지려고 그물을 가지고 오면 경비들이 그들을 막는다. 사람들이 버려진 오렌지를 주우려고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몰고 오지만, 오렌지에는 이미 휘발유가 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감자를 바라본다. 도랑 속에서 죽임을 당해 생석회에 가려지는 돼지들의 비명에 귀를 기울인다. 산처럼 쌓인 오렌지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 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 간다.

하지만 대공황 이후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던 민중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 자체가 의미 있다는 점, 스타인벡이 궁극적으로 그려내고자 했던 것이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발현되는 숭고한 인간애라는 점, 업튼 싱클레어가 《정글》의 마지막 부분을 어설픈 사회주의 옹호로 끝낸 것에 비하면 억지로 이야기를 끌고나가기보다 차라리 그 정도로 마무리해둔 것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분노의 포도》를 향한 그런 식의 비판은 그 힘을 잃는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역시 내공 없는 자로서 더 빈 바닥만 드러내기보다는 짧게 정리하고 끝을 내는 것이 나은 선택이다. 《분노의 포도》는 읽기가 쉽지 않은 소설이다. 긴 분량도 분량이지만 스타인벡의 사실적 묘사가 당시 시대상과 겹치면서 거의 무한한 좌절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다만 구조적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이념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다면 다른 책을 알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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