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카스텐(Guckkasten) <Guckkasten>

| 2011. 10. 16. 00:49

국카스텐에 대한 나의 애정은 이 블로그를 통해서도 여러 번 드러낸 적이 있으며, 오프라인에서는 훨씬 더 그 빈도와 정도가 심한 애정을 듬뿍듬뿍 표현하곤 했다.
검정치마의 어마어마하게 훌륭했던 2집을 리뷰하면서 10월의 언젠가로 미루어두었던 국카스텐의 정규 데뷔 앨범 리뷰의 날을 오늘로 잡았다.
주말 밤에 술도 거의 먹지 않은 채로 이렇게 얌전히 랩탑 앞에 앉아있는 날은 이미 지나온 10월에도, 앞으로 남은 10월에도 존재하지 않을 날이기 때문이다.

좀 진지하게 쓰는 앨범 리뷰는 항상 그 앨범을 틀어놓은 채로 작업한다.
가지고 있던 국카스텐의 CD를 꺼내어 전축에 넣고 재생을 시켰다.
그 전에 20% 인증의 의미와 80% 분량 채우기의 목적으로 앨범 사진을 찍어두었다.

가히 판도라의 상자를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포스.


국카스텐의 앨범을 처음 배송받았을 때 나는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심정이었다.
작은 플라스틱 원반에 담긴 그 거룩한 업적을 개봉한다는 비장함 때문이었으리라고 본다.
이제는 벌써 흐릿해져버린 그 날, 12회말 투 스트라이크 원 볼 카운트에서 다시 방망이를 매만지던 에반 롱고리아의 그 심정으로 나는 앨범을 개봉했다.
아니 사실 앨범을 열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옆면으로 들어가는 덮개가 잘 안 열렸으며, 그 안의 내용물도 무언가에 걸렸는지 꽤 뻑뻑하게 차있었기 때문이다.
경건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뭐 CD 케이스를 이따구로 만들었나 짜증을 내며 혹시라도 케이스에 손상이 갈까봐 조심조심 씨름을 계속했다.
결국 내용물을 보았을 때 그 독특함에 놀라기보다 그 특수성을 ㅡ 초등학교 때 존재하던 특수반의 '특수'의 의미에서 ㅡ 조롱했다.

랩탑 i7 인증은 훼이크. 어떻게 찍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최대한 노력했다.


케이스를 분석해보자.
우선 우리가 처음에 보았던 껍데기는 그야말로 달랑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CD가 든 가마 비슷한 것이 있는데 그 가마는 사방으로 반원형의 덮개를 가지고 있다.
4개의 덮개에는 국카스텐의 멤버 4인의 알록달록한 초상화와 닉네임 비슷한 이름이 적혀있다.
4개의 덮개를 모두 제치면 그 안에 드디어 CD를 볼 수 있는 그런 구조가 또 아니다.
하현우의 덮개 ㅡ 그는 덮개 위에 gribouill이라는 글자를 자신의 애칭으로 적어두었는데 그 뜻은 잘 모르겠다 ㅡ 뒷면에는 간단히 이 앨범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역할과 그 이름을 깔끔하게 인쇄해놨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가마의 덮개를 열면 나오는 것은 바로 위 사진의 좌측으로 보이는 엽서 쪼가리처럼 보이는 것들인데 나는 그 종이 조각들을 보자마자 '참 앨범 안에 엽서를 넣어두다니 거의 벤 폴즈 파이브의 앨범[각주:1]만큼이나 자신들의 영속성을 과시하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이리저리 괴상한 그림들이 그려진 종이의 뒷면에는 각각 트랙의 가사가 적혀있다.
한 번 순서가 뒤바뀌면 가사를 찾아 볼 때 귀찮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확인해 보니 이미 뒤죽박죽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냥 국카스텐 노래 가사는 인터넷으로 찾는다.

다시금 각설하고, 여기까지 쓰니 앨범은 어느새 5번 트랙 'Rafflesia'로 넘어왔다.
포켓몬스터 라플레시아를 떠올려도 무방하게 보이는 것이 가사를 보면 어느 정도 라플레시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곡을 언제 썼는지까지는 정보가 없으나 이들이 한 때 곡을 강원도 펜션에서 작업했다고 하니 강원도에서 라플레시아가 자라거나 아니면 이들이 포켓몬 라플레시아를 만났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가장 옳은 추측은 누군가 라플레시아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겠지만.

6번 트랙 'Vitriol'이 흘러나온다.
이 트랙은 내가 이 블로그에 처음 올린 추천 트랙으로 꼽혔던 건데 곡 소개는 링크를 따라가는 편이 리던던시를 줄이는 방법이겠다.
원래 내가 처음에 올렸던 저 포스팅의 제목은 '2011년 6월의 트랙'이었는데 그만큼 나는 6월 한 달 동안 'Vitriol'을 무시무시하게 많이 들었다.
도무지 한 번 듣기 시작하면 중간에 다른 트랙으로 넘길 수가 없게끔 치밀하게 쓴 곡이고 노래가 끝나면 바로 뒤로 돌려 다시 듣고 싶게끔 중독성있게 쓴 곡이기 때문이리라.
이미지적인 가사를 잘 쓰는 하현우 ㅡ 앨범에 'All Lyrics by 하현우'라는 문구가 있다 ㅡ 는 이 곡에서 탁월한 시적 감각을 보여준다.
저런 가사를 써내는 것도 참 대단하지만 그런 가사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어낸 것도 참 기똥차다.
보통 곡을 쓰는 사람들이 뭔가 영감을 받으면 가사와 함께 곡이 동시에 떠오른다고 하는데 이런 가사와 이런 음악이 동시에 떠오르는 그런 두뇌라면 하루만이라도 가져보고 싶다.

연락이 없던 시간은 나를 찾아와
무거워진 귀를 잡고서 얘기를 하네
밖에서 날 기다린다고

흐르지 않던 계절은 나를 배신해
손을 흔든 채 표정을 바꿔
옷을 훔쳐 나를 가두네 

이어지는 트랙은 'Gavial'이다.
도대체 가비알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봤다.
어째 가사에 악어가 등장한다 했더니 가비알은 가비알과에 속하는 악어라는 결론을 얻었다.
처음 가비알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나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뭔가 황새랑 비슷하게 생긴 하얀 새였다.
크로커다일이나 알리게이터, 라코스테 같은 악어 대신 굳이 가비알을 고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노래는 중간에 한 번 분위기가 반전되었다가 이내 초반의 차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온다.
가사와 함께 음미하면 그 평화는 매우 불안한 성격의 그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말이다.

가비알. http://kr.blog.yahoo.com/panavia707/78


'Limbo'는 언뜻 인트로가 '거울'과 비슷하다.
옥타브 라인의 베이스와 드라이브 감이 쭉쭉 빠진 기타 리프 덕분에 '거울'과는 확연히 다르면서도 그 나름의 멋을 살렸다.
1분 50여초부터 흘러나오는 정체 불명의 소리를 들으면 도대체 이들이 기타와 이펙터를 가지고 무슨 장난을 치며 노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수도 없이 많은 각종 공간계 이펙터를 놓고 무작위적으로 온오프하며 각각의 노브를 멋대로 돌려가며 괜찮은 소리를 찾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지난 번 라이브에서 확인했듯이 이들은 앨범의 사운드 구현을 거의 완벽하게 카피하는 편인데 고작 기타 두 대와 베이스 하나, 드럼 하나로 그 일을 해낸다는 것이다.

9번 트랙은 'Mandrake'로, 맨드레이크로 읽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만드라크'라고 읽어야 이들이 의도한 대로 따라가는 길인 것 같다.
도입부는 이 앨범 다음에 발매된 EP 앨범 'Tagträume'의 '매니큐어'와 비슷한 느낌, 곡의 분위기는 그 밝음의 정도가 'Vitriol'과 비슷한 느낌.
1절이 끝난 뒤 나오는 멋진 기타 솔로 ㅡ 태핑으로 추정되는 ㅡ 는 이 곡의 백미고 곡이 4분을 향해 달려갈 때쯤부터 폭발하는 하현우의 샤우팅은 곡의 클라이막스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했다던 하현우의 그 거침없는 기개는 9척의 칼을 매고 전장터로 출진하는 늠름한 장수의 그것과 맞먹는다.
지릴 정도의 패기는 지릴 정도의 실력에서 나오는 법.

10번 'Sink Hole'부터는 앨범의 유기적인 완성도가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한다.
나의 지인은 국카스텐의 노래를 두고 '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평을 했는데 그 평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도대체가 그 기원을 찾기가 곤란한 이들의 신개념 사이키델릭 하드 락을 듣고 있자면 각각의 곡에서 무한한 감상의 포인트를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음악 감상의 참재미는 그런 디테일을 캐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디테일로 채워진 앨범 리뷰는 아주 조잡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소소함을 잡아내는 것은 이 글을 읽고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맡긴다.

위닝 일레븐 트랙은 '꼬리'로 역시, 방금 말한 것처럼, 청자의 집중도를 저하시키는 트랙이다.
하지만 마지막 트랙 'Toddle'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우리 말로는 토들이라고 발음하는 저 단어의 뜻은 '어린 아이가 아장아장 걷다'인데 그 점을 감안하고 노래를 들으면 정말 기가 막힌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비록 하현우의 가사는 신체적으로 어린 아이의 걸음이기보다, 정신적으로 어린 사람의 불안한 걸음을 의미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그 기막힘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첫 트랙으로 돌아간다.
는 훼이크다.
이들의 앨범에는 13번 히든 트랙이 있다.
바로 '꼬리'의 어쿠스틱 버전.
국카스텐의 편곡 능력은 EP 앨범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꼬리'의 어쿠스틱 버전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진짜 첫 트랙 '거울'이다.
10년만 지나도 한국 락 음악의 불후의 명곡으로 평가받을 이 트랙에 대해 논하는 것은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의 에너지도 낭비요, 그 조잡한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독자의 에너지도 낭비다.



2번 트랙 'Violet Wand'은 참 신기한 이펙팅이 그야말로 축제를 열고 있는 트랙이다.
하현우의 목소리가 워낙 매력적이라 국카스텐의 음악을 들으면 어느새 보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마련인데 그 노래를 뒷받침하는 세션들의 반주에는 수많은 경이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되겠다.

솔직히 시각도 시각이지만 이렇게 오래 글을 쓰고 앉았으니까 내가 좀 지쳐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거의 끝이 보이니까 힘을 내어 다음 트랙을 소개하면 '미로'다.
이들의 밴드명이 의미하는 만화경과 이들의 음악적 특성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이키델릭이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재인 미로답게 곡 전체가 풍기는 분위기로만 보자면 이 앨범에서 가장 진한 국카스텐 냄새를 풍기고 있는 트랙이라고 할 수 있다.

'미로'의 끝에서 하현우의 랄랄라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괴테의 'Faust'를 만나게 된다.
이 포스트의 끝이 'Faust'로 끝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바로 이 곡이 국카스텐의 데뷔 앨범이라는 용의 마지막 눈을 찍는 화룡점정이라고 생각되어서 처음부터 글의 구도를 이렇게 구상했다.
6분 19초에 달하는, 괴테가 '파우스트'를 60여년에 걸쳐 썼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긴 곡을 통해 국카스텐이 청자에게 전달하는 감성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특히나 4분 30초가 넘어서 나오는 기타 솔로는 내 인생의 기타 솔로에 충분히 꼽힐 만큼 기교와 느낌이 감동적으로 살아있다.
도무지 앨범 버전을 찾을 수가 없어 라이브 영상을 걸어둔다.


참 저 때만 해도 구질구질했는데, 렛츠락에서 돈을 너무 벌어서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다던 그의 말이 사실인 건지 지금은 참 때깔도 곱고 그냥 겉보기에도 간지가 난다.

종잡을 수 없는 국카스텐의 음악 스타일에 맞춰서 나도 한 번 종잡을 수 없는 리뷰를 써보고 싶었다.
그렇게 완성된 이 글은 종잡을 수 없다는 점에서 성공했지만 그 외에는 모두 실패해버린 리뷰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국카스텐의 정규 2집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제 잠이 쏟아지니 그만 CD를 끄고 잠에 들어야겠다.
CD를 정리하기 위해 CD를 먼저 '가마'에 넣고 널부러져있던 가사 종이를 한데 모아 넣고 반원 모양의 덮개를 덮은 뒤, 마지막에 껍데기에 잘 정리해 넣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CD의 모양은 국카스텐이라는 만화경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만화경 CD 케이스라는 컨셉은 매우 훌륭하지만 컨셉의 구현이 잘못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리.

그런데 자꾸 'Faust'의 그 때깔 좋은 솔로가 내 귀를 맴돈다.
아무래도 국카스텐이 부린 마법 같은 만화경에 내 정신이 홀딱 빠져버렸나보다.
  1. 벤 폴즈 파이브의 'Ben Folds Five' 앨범에는 앨범 커버에 친절하게 우표 붙이는 곳까지 인쇄해서 여러가지에 대해 묻는 간단한 설문조사를 수행하게끔 했다. 물론 이는 벤 폴즈 파이브의 의견이었다기보다 캐롤라인 레코즈의 횡포라고 추측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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