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가 '해변의 카프카'를 주로 썼다던 바로 그 새벽 즈음에 하권의 마지막 장을 다 읽고 책을 '턱'하고 덮었다.
예전에 출판된 책이라 양장본은 아니었기에 실제로 '턱'하고 덮히는 느낌은 없었지만, 내가 느끼기에 '해변의 카프카'를 덮는다는 것은 그만큼 육중한 행위였다.
소설이 위기로 접어들면서 내용 면에서 점점 그 무게를 더해갔기 때문이 아닐까.
명확한 카타르시스가 없었기에 그렇게 축적된 무게감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게감은 단순히 나를 짓누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푹신한 바닥에 엎드린 채로 뭔가 적당한 질량과 부피를 가진 물체에 ㅡ 내가 보기에 사람의 육체가 가장 적당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는데 ㅡ 눌려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적당한 압박감은 은근히 안락한 맛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 속 시원한 느낌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이 느낌은 '해변의 카프카'가 주는 무게감과 결합되어 독자에게 무겁지만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해소되는 느낌을 준다.
우연의 일치로 건물 밖에 내리는 시원한 가을 장대비가 이와 같은 해소의 감성을 자아내는데 도움을 주었으리라.
줄기차게 내릴 때는 가혹하지만 일단 그치고 난 뒤에는 세상을 정화하며 만물을 성장시키는 바로 그런 비다.
지금 산천을 흠뻑 적시는 저 비와 '해변의 카프카'의 주제 의식은 이런 면에서 상당히 닮아 있는 것 같다.
'해변의 카프카'는 아주 다양한 요소들을 한데 넣고 푹푹 끓여낸 맛있는 잡탕과도 같은 소설이다.
여기에서 잡탕이라는 표현은 '잡'이라는 부정적 느낌의 음절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잡탕'이라는, 말 그대로 이것저것이 섞인 총체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우선 나는 '해변의 카프카'를, 대치되는 두 가지 부류들, 예를 들어 인간과 고양이, 삶과 죽음,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며 다무라라는 겉에서의 자아와 카프카라는 안으로부터의 자아의 합일점을 고민하는 실존적 문제를 다룬 소설을 빙자한 철학 에세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형이상항적 서술과 철학적인 요소들 ㅡ 그것을 섹스 머신인 여자와 결합한 것은 참 하루키다운 발상이다 ㅡ 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드는 생각.
여기에 '다무라 카프카'라는 이름이 뜻하는 바를 고찰하면 이와 같은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다무라 카프카의 내면적 자아로서 중요한 순간에 '마음의 소리'를 내는 까마귀 소년은 '카프카'라는 단어가 체코어로 까마귀를 뜻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까마귀 소년이라는 별도의 존재를 벗어나 다무라 카프카의 떨어질 수 없는 일부가 된다.
결국 인간 다무라 카프카는 아버지라는 현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다무라'라는 정체성과 비현실적인 망상적 자아,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더 본질에 가까운 자아인 '카프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다무라와 카프카는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15세의 소년을 조금씩 앞으로, 때로는 그의 의지에 맞게 때로는 그의 의지에 거슬러, 나아가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다무라 카프카는 생장이 아닌 성장을 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기반으로 한 소년의 사랑 경험과 운명과 의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아에 대한 실존적 탐구를 다루는 성장 소설.
이것이 '해변의 카프카'를 바라볼 수 있는 두 번째 관점이자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이겠다.
이런 관점에 까마귀 소년이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내가 써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퀴퀴하고 잘난 체 하는 듯한 관점에서 벗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는다면 기행 소설이나 미스테리 소설 정도로 읽을 수도 있겠다.
하권의 중반까지만 해도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해변의 카프카'를 읽는 것이 가능했는데 나는 그 때 코엔 형제가 이 이야기를 나름의 버전으로 각색하여 영화로 만든다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에 산재한 키치함과 감각적인 대화들, 세련됨 따위를 코엔 형제의 재치라면 충분히 스크린으로 옮길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비록 소설의 뒷부분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감독도 ㅡ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지옥의 묵시록'에서 보여준 커츠 대령의 내면 묘사라면 조금 가능성이 보인다 ㅡ 감히 넘보기 힘든 경지의 복잡함과 진지함을 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다음 상황이 코엔 형제의 영화로 각색된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자.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다양한 인물들이 다각적으로 엮이는 이야기 구조는 기발하다.
이렇게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서로 연관성을 갖는 구조는 멀리서는 영화 '크래쉬'에서, 가까이서는 웹툰 '정열맨'의 초반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흔한 것이지만 하루키는 이 진부한 방법론마저 독특한 세련됨으로 치장한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에서 직접적으로 구분되는 두 세계를 잇기도 하지만 ㅡ '방'이라는 공간적 대상이나 '입구의 돌'이라는 물질적 대상을 통해 ㅡ 대부분 그 관계는 추상적인 메타포를 기반으로 성립하게 된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이 소설의 다양한 정체성에 메타포가 갖는 열린 해석의 여지는 독자에게 폭 넓은 평가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표지 날개에 달린 다음 인용구는 이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전부에 대해 세세하게 '하루키처럼 글 쓰는 법'을 아는 것은 나로선 불가능했으나 최소한 그 방법의 일부가 추천사에 공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이미 나는 하루키처럼 글을 쓰기엔 틀려먹은 사람이다.
그러니 자신의 자식을 세계적인 대문호로 키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자식 교육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아마 그것은 천재일우의 확률로 찾아볼 수 있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예전에 출판된 책이라 양장본은 아니었기에 실제로 '턱'하고 덮히는 느낌은 없었지만, 내가 느끼기에 '해변의 카프카'를 덮는다는 것은 그만큼 육중한 행위였다.
소설이 위기로 접어들면서 내용 면에서 점점 그 무게를 더해갔기 때문이 아닐까.
명확한 카타르시스가 없었기에 그렇게 축적된 무게감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게감은 단순히 나를 짓누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푹신한 바닥에 엎드린 채로 뭔가 적당한 질량과 부피를 가진 물체에 ㅡ 내가 보기에 사람의 육체가 가장 적당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는데 ㅡ 눌려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적당한 압박감은 은근히 안락한 맛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 속 시원한 느낌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이 느낌은 '해변의 카프카'가 주는 무게감과 결합되어 독자에게 무겁지만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해소되는 느낌을 준다.
우연의 일치로 건물 밖에 내리는 시원한 가을 장대비가 이와 같은 해소의 감성을 자아내는데 도움을 주었으리라.
줄기차게 내릴 때는 가혹하지만 일단 그치고 난 뒤에는 세상을 정화하며 만물을 성장시키는 바로 그런 비다.
지금 산천을 흠뻑 적시는 저 비와 '해변의 카프카'의 주제 의식은 이런 면에서 상당히 닮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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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는 아주 다양한 요소들을 한데 넣고 푹푹 끓여낸 맛있는 잡탕과도 같은 소설이다.
여기에서 잡탕이라는 표현은 '잡'이라는 부정적 느낌의 음절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잡탕'이라는, 말 그대로 이것저것이 섞인 총체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우선 나는 '해변의 카프카'를, 대치되는 두 가지 부류들, 예를 들어 인간과 고양이, 삶과 죽음,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며 다무라라는 겉에서의 자아와 카프카라는 안으로부터의 자아의 합일점을 고민하는 실존적 문제를 다룬 소설을 빙자한 철학 에세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형이상항적 서술과 철학적인 요소들 ㅡ 그것을 섹스 머신인 여자와 결합한 것은 참 하루키다운 발상이다 ㅡ 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드는 생각.
여기에 '다무라 카프카'라는 이름이 뜻하는 바를 고찰하면 이와 같은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창녀라는 이름도 다르게 생각하면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다무라 카프카의 내면적 자아로서 중요한 순간에 '마음의 소리'를 내는 까마귀 소년은 '카프카'라는 단어가 체코어로 까마귀를 뜻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까마귀 소년이라는 별도의 존재를 벗어나 다무라 카프카의 떨어질 수 없는 일부가 된다.
결국 인간 다무라 카프카는 아버지라는 현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다무라'라는 정체성과 비현실적인 망상적 자아,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더 본질에 가까운 자아인 '카프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다무라와 카프카는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15세의 소년을 조금씩 앞으로, 때로는 그의 의지에 맞게 때로는 그의 의지에 거슬러, 나아가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다무라 카프카는 생장이 아닌 성장을 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기반으로 한 소년의 사랑 경험과 운명과 의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아에 대한 실존적 탐구를 다루는 성장 소설.
이것이 '해변의 카프카'를 바라볼 수 있는 두 번째 관점이자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이겠다.
이런 관점에 까마귀 소년이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도대체 어디서부터 네 책임은 시작되는 것일까? 걷잡을 수 없이 혼탁해진 의식을 추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너는 필사적으로 현재의 위치를 알아내려 한다. 흐름의 방향을 확인하려 한다. 올바른 시간의 축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찾을 수가 없다. 사실과 가능성의 경계선조차 찾을 수 없다. 네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지금 아주 미묘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뿐이다. 미묘하고 동시에 위험한 장소다. 너는 예언의 원리나 논리를 규명하지 못한 채, 그 진행 속에 포함되어 일체가 되어버린다. 어딘가 강가에 있는 도시가 홍수에 쓸려가듯이, 거기 있는 모든 도로 표지는 지금은 수면 아래 가라앉아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집집의 이름 없는 지붕뿐이다.
이윽고 사에키 상은 똑바로 누운 네 몸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 다리를 벌리고, 돌처럼 딱딱해진 네 페니스를 자기 안으로 이끈다. 너는 다른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 그녀가 선택한다. 어떤 모양의 그림을 그리듯 깊숙이, 그녀는 허리를 비틀어댄다. 그녀의 곧은 머리칼이 네 어깨 위에서 버들가지처럼 소리 없이 춤춘다. 너는 조금씩 부드러운 진흙탕 속에 삼켜져간다. 세계의 모든 것이 따뜻하고 촉촉하고 불분명하며, 그 가운데 네 페니스만이 단단하고 윤기 나는 존재다. 너는 눈을 감고 너 자신의 꿈을 꾼다. 시간의 흐름이 무척 불명확해진다. 조수가 차 오르고 달이 뜬다. 얼마 뒤 너는 사정한다. 물론 너는 그것을 저지할 수 없다. 그녀 속에 몇 번씩이고 강하게 사정한다. 그녀는 수축하며, 네 정액을 받아들인다. 그래도 그녀는 아직 자고 있다. 눈을 뜬 채 잠들어 있다. 그녀는 다른 세계에 있다. 네 정액이 다른 세계에 삼켜져간다.
내가 써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퀴퀴하고 잘난 체 하는 듯한 관점에서 벗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는다면 기행 소설이나 미스테리 소설 정도로 읽을 수도 있겠다.
하권의 중반까지만 해도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해변의 카프카'를 읽는 것이 가능했는데 나는 그 때 코엔 형제가 이 이야기를 나름의 버전으로 각색하여 영화로 만든다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에 산재한 키치함과 감각적인 대화들, 세련됨 따위를 코엔 형제의 재치라면 충분히 스크린으로 옮길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비록 소설의 뒷부분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감독도 ㅡ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지옥의 묵시록'에서 보여준 커츠 대령의 내면 묘사라면 조금 가능성이 보인다 ㅡ 감히 넘보기 힘든 경지의 복잡함과 진지함을 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다음 상황이 코엔 형제의 영화로 각색된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자.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어쨌든 다무라 군은, 다무라 군의 가설은 꽤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과녁을 향해서 돌을 던지고 있어. 그것은 알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타포를 통하면 그 거리는 훨씬 짧아집니다."
"그렇지만 나도 다무라 군도 메타포는 아니잖아?"
"물론이죠" 하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메타포를 통해 저와 사에키 상 사이에 있는 것을 꽤 많이 생략해 갈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올려다본 채, 다시 살짝 미소 짓는다. "그건 내가 이제까지 들어본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구애의 말이네."
다양한 인물들이 다각적으로 엮이는 이야기 구조는 기발하다.
이렇게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서로 연관성을 갖는 구조는 멀리서는 영화 '크래쉬'에서, 가까이서는 웹툰 '정열맨'의 초반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흔한 것이지만 하루키는 이 진부한 방법론마저 독특한 세련됨으로 치장한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에서 직접적으로 구분되는 두 세계를 잇기도 하지만 ㅡ '방'이라는 공간적 대상이나 '입구의 돌'이라는 물질적 대상을 통해 ㅡ 대부분 그 관계는 추상적인 메타포를 기반으로 성립하게 된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이 소설의 다양한 정체성에 메타포가 갖는 열린 해석의 여지는 독자에게 폭 넓은 평가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표지 날개에 달린 다음 인용구는 이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 소설은 읽는 사람마다 그 읽는 법이 다르고, 대부분의 독자가 한 번 읽고 마는 게 아니라 여러 번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과 깊은 뜻, 그리고 더욱 큰 재미를 느낀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매우 흐뭇하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전부에 대해 세세하게 '하루키처럼 글 쓰는 법'을 아는 것은 나로선 불가능했으나 최소한 그 방법의 일부가 추천사에 공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이미 나는 하루키처럼 글을 쓰기엔 틀려먹은 사람이다.
그러니 자신의 자식을 세계적인 대문호로 키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자식 교육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아마 그것은 천재일우의 확률로 찾아볼 수 있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열다섯 살 때 밤을 세워가며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그리고 카프카 전집 등을 탐독했다는 하루키…(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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