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 2011. 11. 11. 10:55

이제는 다소 빛이 바랜, 정려원의 대한 팬심으로 보고자 했던 영화.
영화관 개봉 당시에 꼭 보러 가리라고 마음 먹었으나 이상하게도 영화관과 참 인연이 없는 나의 팔자 ‘덕’에 보지 못했다.
내가 위 문장에서 ‘탓’이라는 음절 대신 ‘덕’이라는 음절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 평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리라는 것 정도야 모두들 추측했겠지?
‘김씨 표류기’로 좋은 배우의 자질을 보여준 정려원은 ‘적과의 동침’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대체 그녀는 어떤 점에서 ‘적과의 동침’의 시나리오에 끌려 여주인공을 맡게 되었을까?
오늘은 이 미스터리를 중점적으로 파헤쳐 볼 생각이다.

영화의 평은, 다른 예술 작품의 평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다각적인 방면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서술할 수 있다.
‘적과의 동침’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를 평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 영화와 아주 유사한 스토리텔링 구조를 가진 ‘웰컴 투 동막골’과 비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웰컴 투 동막골’은 누구와 봤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머리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영화이므로 이는 별로 적절한 방법은 아니다.
굳이 ‘웰컴 투 동막골’과 대비하여 ‘적과의 동침’을 이야기 하자면, ‘웰컴 투 동막골’의 성공에 영합하려다 실패한 조금 더 어둡고 진지한 버전의 ‘웰컴 투 동막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두 영화를 비교하자면 캐릭터의 유사성, 카메라 워크의 유사성, 이야기 전개의 유사성 등을 논의할 수 있겠으나 굳이 흐릿흐릿한 ‘웰컴 투 동막골’의 기억까지 되살려가며 글을 쓰기엔 지금 너무 피곤하므로 포기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영화의 비교 대상으로 영화만을 정해두진 않았다.
우리는 영화와 음악을 비교할 수도 있고, 영화와 미술을, 영화와 문학을 비교할 수도 있으며 같은 영상 매체인 광고나 뮤직 비디오, 드라마 따위와 비교할 수도 있다.
‘적과의 동침’을 보면서 나는 이 영화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광고를 하나 생각했다.
실존하는 광고는 아니지만, 대충 아래 짤방의 내용을 훑어 보면 내가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리라.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TV를 잘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요새도 신발 회사 아티스가 이런 식의 광고를 공장처럼 찍어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아티스식 신발 광고에 익숙할 것이다.
‘적과의 동침’에 대해 자세히 논하기 이전에 내가 가상의 광고, ‘아티스 트랜스포머’를 이 영화와 비교한 만큼, 아티스식 신발 광고에는 어떤 점들이 필수 요소로 존재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순서다.
내가 분석한 바로는 아티스식 신발 광고는 다음의 요소들이 절대 빠질 수 없다.

1. 먼저 원래 만화의 선악 구도를 그대로 가져와 비슷한 양상의 진부한 갈등을 만들면
2. 선의 캐릭터 ㅡ 대개 주인공 ㅡ 가 ‘당연히’ 위기에 빠지게 되고 갑자기 ‘아티스’라는 어떤 신적 존재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3. 그러면 되도 안 되는 방법으로 만화 캐릭터와 연관된 신발이 갑자기 등장하여
4. 아주 무난하게 적을 물리친다
5. 한 컷짜리 자매품 광고가 ㅡ 이것은 대개 ‘여자 만화’의 짭퉁 캐릭터 같은 것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ㅡ 그 뒤에 등장.

짤방은 4번과 5번이 생략되어 있는데 그 디테일까지 살렸더라면 정말 폭소를 주는 전설 아닌 레전드 짤방이 되었을 터.
어쨌든 아티스 선전들의 그 묘한 중독감은 매번 같은 식의 이야기 전개와 결말 부분에서 갑자기 요상한 아티스 신발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적과의 동침’은 이런 뻔한 패턴의 ‘아티스식 광고’와 거의 다를 바 없다.
그만큼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뻔한 것들만 뻔뻔하게 보여주다가 이상하게 끝이 난다는 말이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선(善)으로 생각하는 세력이 먼저 존재하고, 일시적으로 악(惡)의 무리로 간주되는 세력이 등장하여 갈등을 일으키지만 더 큰 악의 무리의 존재와 원래 악인 줄 알았던 무리의 본질적인 선함으로 기존의 선과 악은 변증법적으로 새로운 선을 탄생시키고 그 새로운 선이 더 큰 악과의 갈등을 일으켜 또 다른 변증법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매우 김이 빠지는 구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같은 구조를 쓰는 모든 영화가 전부 같은 느낌을 낸다는, 다르게 말해 이런 김이 빠지는 구조를 사용하는 영화는 전부 ‘적과의 동침’ 같은 졸작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같은 코드로 쓴 노래는 죄다 똑같다는 억지를 부리는 것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도, 5도, 6도 마이너, 4도로 이어지는 매직 코드로 우리는 수많은 다양한 음악을 만들 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두 번의 정반합 과정이 이루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우리는 얼마든지 다양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분위기를 어떻게 가져갈 것이고 어떤 식으로 그 분위기를 조절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시종일관 이마에서 주름이 사라지지 않을 진지한 분위기나 실없이 웃기는 분위기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은 흥행에 대해 강력한 도박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영화의 경우 평의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영화 분위기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다.
관객들에겐 적당한 텐션과 적당한 릴렉스가 같이 존재해야 한다.
이 중용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고 가장 흔한 방법이 텐션과 릴렉스를 번갈아서 배치하는 것이다.
조금 있어 보이게 말하면 분위기에 대한 음성 피드백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그냥 멍하니 영화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 조금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적과의 동침’을 바라 보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쉴 새 없이 긴장되는 순간과 긴장을 푸는 순간을 강요하고 있다.
이야기가 대충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면 주는 긴장감의 양을 조금씩 늘리고 푸는 긴장감의 양을 조금씩 줄임으로써 역시나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중요한 순간에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릴 수 있다.
‘적과의 동침’ 에서 어떤 요소가 우리에게 긴장을 풀게 하고 어떤 요소가 긴장을 주는지, 그리고 장래에 어떤 요소가 긴장감을 점점 고조시킬 것인지, 그리고 이 같은 사건이 어떻게 배치될 것인지 파악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뻔하디 뻔하다.

하지만 뻔하디 뻔한 영화의 매력은, 절대 성공하지는 못할 망정 절대 실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아주 비슷하고 유명한 영화가 기존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만드는 영화인 이상 ‘적과의 동침’ 제작진은 이 영화에 굉장한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ㅡ 만약 그렇더라면 굉장히 슬픈 일이다.
배우 정려원은 이런 진부함에 기댄 적절한 성공 가능성을 보고 ‘적과의 동침’에 출연할 마음을 굳힌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정려원을 포함한 여러 배우들과 제작진들도 그 무난한 가능성을 보고 이 영화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패하지 않은 영화의 반열에 오르는 것에 실패했다.
그렇게 무난한 요소들을 많이 집어넣어 물타기를 시도한 영화가 실패한 이유는?

그 이유는 엔딩 부분에 있다.
솔직히 이 영화는 후반부까지 비록 뻔하기는 하지만 그 뻔함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어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원래 나는 평의 주제를 ‘왜 이 정도의 영화가 주목 받지 못했나.’로 정할 마음이었다.
근데 그렇게 뻔한 것들을 계속 보면서 관객들을 한참 뻔한 것에 익숙하게 해놓고서는 하늘에서 아무 이유 없이 뚝 떨어진 엔딩을 넣은 것이다.
어차피 실화에 바탕을 둘 것이었다면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뻔하게, 실화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엔딩을 만들었으면 되었을 것을 무리하게 치열한 감동을 주려는 시도를 하는 바람에 한끝 차이로 무난한 영화에서 졸작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영화의 마지막 15분 정도에서 느껴지는 실망감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모든 상황이 억지스럽고 어설프다.
분노를 폭발하며 총을 난사하다가 죽는 그런 뻔한 장면들, 죽어가는 과정에서 손을 맞잡고 마지막 못다한 말을 하는 그런 손발을 안드로메다로 날리고 싶게 만드는 센스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왜 하필 그 마지막 현장을 습격한 것은 미군이어야 했을까.
그리고 거기에 왜 하필이면 도망간 그 청년이 등장해야 했을까.
총에 맞아 죽는 인물과 살아 남는 인물을 정한 것은 어떤 기준이었을까.
억지로 감동을 주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아무 장치가 끌어다 왔으니 이렇게 뒤죽박죽인 결말이 만들어진 것이리라.
정말 수많은 어처구니 없는 질문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모든 비판을 거슬러 칭찬할 수 있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뭐 다른 연기파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는 것이야 그 배우의 팬 까페에 가면 수도 없이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니 딱히 이 영화에 나온 배우들의 팬이 아닌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팬이었고 지금도 딱히 팬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운 정려원의 연기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인데, 무슨 유치한 팬심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말이 아니고 정말 ‘적과의 동침’에서 정려원이 보여준 연기는 수준급이다.
입에 잘 맞지 않았을 사투리도 자연스럽게 소화했고 감정의 분출을 자연스럽게 조절하여 ‘쟤는 정말 연기를 발로 한다.’라는 느낌을 단 한 번도 들게 하지 않았다.
‘김씨 표류기’를 보면서 정려원이 단순히 가수에서 배우로 변신한 그렇고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이 인상은 ‘적과의 동침’을 통해 더욱 확고한 것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통증’ 같은 영화를 보는 통증까지 견뎌내며 그녀의 연기력을 확인할 일은 없을 것이다.

뭐 써놓고 보니 중구난방이다.
이럴 땐 더 이상한 글이 되기 전에 빨리 그만 두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도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담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