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ff Buckley <Grace>

| 2011. 11. 24. 12:45

음악과 인간의 인격 형성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의 옛 이야기를 꺼내 이를 뒷받침 할 수야 있겠지만 굳이 나의 소소한 음악사를 들추지 않더라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존재하는 음악에 대한 심의 규제 위원회라는 조직의 예를 떠올려 보면 그 방면의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이런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대개의 경우 음악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보다 가사라는, 구체적이나 단편적인 요소만을 보고 청취 등급 판정을 내리는 모습이 역력하지만, 뭐 어쨌든 가사도 음악의 일부니까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의 청소년기 성장 과정을 이끌었던 것은 훌륭한 책도, 훌륭한 영화도, 훌륭한 선생이나 친구도 아닌 훌륭한 음악 ㅡ 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훌륭한 음악을 기반으로 한, 또는 훌륭한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음악들 ㅡ 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새도 나는 여러가지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이 음악을 더 옛날에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상당히 질 좋은 음악을 많이 듣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 어떤 음악보다 이런 생각을 많이 들게 했던 음악은 바로 제프 버클리의 그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주중의 아침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피곤한 육신을 이끌고 학교에 갔다.
민족의 등불이 되자는 학교의 모토 하에 아침 자습시간 전마다 우리는 교실 청소를 해야 했다.
청소 시간 이전까지의 시간은 보통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데 쓰이거나 간밤에 있던 일에 대해 잡담을 하는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를 하던 나는 대개 아침 시간을 음악을 들으며 보냈던 것 같다.
반에는 나 말고도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당시에 내가 빠져지내던 음악은 메탈류였고 그들이 즐겨 듣는 음악은 브릿 팝 계열의 말랑말랑해 보이는 그런 락이었다.
우리는 가끔 서로의 음악을 공유했다.
그러나 대부분 서로의 취향엔 잘 맞지 않았다.

바로 그 어느 날 그 당시엔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꽤 친하다고 할 수 있는 한 친구가 이어폰을 건네며 이 사람 음악 좀 들어보라고 했다.
노란색 CD 플레이어 안에 담겨 있던 음반은 제프 버클리의 'Grace'.
음반 표지에 인쇄된 말쑥하게 생긴 청년의 얼굴을 힐끔 보고, '그저 그런 영국 놈이겠군.'이라고 생각하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무슨 트랙을 들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앨범과 동명의 트랙인 2번 'Grace'를 듣기로 했다.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다음 트랙으로 넘겼지만 역시 귀에 걸리는 음악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조금이나마 귀에 잘 들어 오는 트랙을 찾았지만 나는 약 10여분의 시간을 낭비했을 뿐이다.
그 때 청소를 시작하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이어폰을 귀에서 빼 CD 플레이어를 그녀에게 돌려주며 뭐 그냥 그렇다라는 평을 전했다.
나는 제프 버클리라는 이름의 아티스트를, 영국 출신의 그저 그런 힘 없는 말쑥한 녀석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거의 내 개인 음악사(史)상 최초이자 최대의 실수.

제프 버클리는 계속해서 나의 삶에서 스쳐 지나갔다.
20살이 되던 해, 나는 에릭 클랩튼의 내한 공연을 계기로 블루스와 올드 락에 빠졌다.
그 관심은 한 쪽으로는 지미 페이지를 거쳐 레드 제플린으로 빠졌고, 다른 한 쪽으로는 제프 벡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CD 앨범을 사모으는 것이 취미였던 내게 제프 벡(Jeff Beck)의 앨범을 사기 위해선 항상 제프 버클리(Jeff Buckley)의 이름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름을 볼 때마다 나는 '영국 출신의 그저 그런 힘 없는 말쑥한 녀석'만 떠올리는 데 그쳤고 다시 그의 음악을 들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내게 처음 제프 버클리를 알려주었던 그녀가 자기는 제프 버클리라는 이름을 찾을 때마다 제프 벡이라는 이름을 보게 되는데 제프 벡은 어떤 음악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봤던 적이 있다.
나는 왜 그런 관용을 지니지 못했던 걸까.

결정적인 기회도 있었다.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머리에서 튀어나오는 전지현 씨의 17차 광고 사막편을 처음 볼 때였다.
그러니까 인터넷에 따르면 때는 2008년.

꽤 많은 사람이 기억할 광고라고 생각한다. http://blog.naver.com/jackychan525/100051321101


전지현의 무시무시한 몸매와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김민지라는 신예에도 꽤 주목했다.
그러나 이 광고가 나의 혼을 쏙 빼놓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이었다.
도대체 저 사막의 건조함을 차갑게 적셔주는 청량감은 누구의 어떤 노래란 말인가?
나는 인터넷에서 광고의 동영상을 찾았고 잘 되지도 않는 영어 LC 실력을 발휘해 가사 몇 구절을 받아적었다.
그렇게 어렵게 찾은 노래의 주인공은 제프 버클리였고, 그 노래의 제목은 'Lilac wine'이었다.


엄청났다.
무엇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트랙이었다.
군더더기가 없고 지저분하다거나 더러운 것이 깔끔히 배제된, 정화된 사이키델릭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이 이상 제프 버클리의 음악을 찾아 듣지 않았다.

내가 이런 숱한 기회를 다 놓치고는 이제서야 제프 버클리의 음악을 듣게 된 것은 나의 음악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지인의 페이스북 프로필에서 그의 이름을 봤을 때였다.
아, 이 사람도 제프 버클리를 좋아한다면 나도 꼭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 나이 24세, 만 22세에 나는 제프 버클리의 'Grace'를 들었다.
그리고 지난 세월 그를 외면해온 나를 질책하며 내가 이 훌륭한 음악을 고등학생 때 들었다면 지금쯤 좀 더 내가 바라는 인간상에 가까워져 있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했다.
제프 버클리의 음악이 주는 마리아나 해구와 같은 깊이에서 나의 치기 어린 사고를 키웠더라면, 명망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나의 목표에 지금보다 더 접근해있지 않았을까.

그는 영국 출신도 아니었고 그저 그런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힘이 없기는 커녕 아주 철철 넘쳐 흐르는 말쑥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쓰레기 같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선입견을 고칠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았던 사오정 같은 녀석이었다.

제프 버클리의 음악[각주:1]은, 나의 아주 졸렬한 네이버 데뷔에서도 언급했지만, '도무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유래했다고 보기 힘든 면이 있다.'.
'Grace' 앨범을 듣다 보면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 수가 있지?'다.
물론 모든 트랙을 제프 버클리가 만든 것은 아니다.
'Lilac wine'은 제임스 셸튼이라는 사람이 1950년에 만든 노래고, 'Hallelujah'는 캐나다 출신의 포크의 전설 레너드 코헨의 곡이고, 'Corpus christi carol'은 후기 중세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영국 전통 캐롤이다.
그러나 저 세 트랙마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음악을 바꿀 수 있지?'라는 단어 몇 개만 바뀌었을 뿐이지 토대는 전혀 바뀌지 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Corpus christi carol'을 제외한 모든 곡이 4분 중반에서 6분 후반대의 다소 긴 곡들로 앨범 전체를 보자면 다소 호흡이 긴 편이나 트랙 안에서 끊임없이 변주를 시도하기 때문에 트랙 단위로 잘라 보면 호흡이 길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한다.
각 트랙의 길이가 다소 긴 만큼 제프 버클리의 음악은 시작부터 중반까지의 어떤 한 부분, 뭐 어떤 코러스라든지 어떤 기타 라인이라든지, 만을 듣기 위한 그런 성질의 곡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연스런 흐름의 변화를 느껴야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음악이므로 혹시나 제프 버클리를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내가 6년 전에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냥 1번 트랙 'Mojo pin'을 틀고는 느긋하게 앉아서 음악에 집중하자.
그러다 보면 정말 놀라운 것들을 많이 들을 수 있으리라.
죽기 전에 이런 앨범 한 번 못 들어 본다는 것은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사람의 삶을 더더욱 보잘 것 없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도대체가 트랙 단위의 설명을 한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에 이 앨범 소개에서는 그런 얼척 없는 짓을 시도하지 않으련다.
그 트랙에 대한 괜찮은 말이 생각날 때마다 꾸준히 '트랙'란에 소개 ㅡ 이미 'Eternal life'는 그런 식으로 블로그에 올라와 있다 ㅡ 할 생각이다.
일단 이번에는 위에 링크해 둔 'Lilac wine'이나 듣자.
그러고 제프 버클리의 블랙홀에 휘말려가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주저없이 'Grace' 앨범을 사서 듣자.


제프 버클리가 살아 있다면 지금쯤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있을까?
이미 죽어버려 나를 안타깝게 만드는 뮤지션 랭킹에서 제프 버클리는 존 본햄을 제치고 1위가 되었다.
내 페이스북 프로필에 제프 버클리의 이름을 올려두었음은 물론이다.
  1. 물론 제프 버클리 사후에 발매된 'Sketches For My Sweetheart The Drunk' 앨범은 아직 들어보지 않은 상황이기에 제프 버클리의 음악이라는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프 버클리 유일무이의 앨범이라고 평하는 'Grace'만큼은 열심히 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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