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조나단 스위프트의 책이다.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이라는 제목의 책이 무슨 내용일지 감이 오지 않아 원작의 제목을 멋대로 의역한 결과물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영어 원제를 공개한다.
"Directions To Servants".
조나단 스위프트가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걸친 기록을 집대성하며 쓰다 만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본격적인 소개에 앞서 조나단 스위프트 같은 지식인이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이란 어떤 것인지 맛보기로 살펴보자.
잘못을 저질렀을 땐 뻔뻔하게 적반하장으로 나가라. 그리고 마치 피해자인 양 행동하라. 이렇게 하면 주인님 내외분의 화가 오히려 누그러들 것이다.
얼씨구?
서너 차례 부름을 받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타나지 마라. 개 이외에는 그 누구도 첫 번째 휘파람 소리에 나타나는 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주인님께서 "거기 누구 없어?"라고 부르신다면 어떤 하인도 나타날 필요가 없다. '거기 누구'라는 말은 그 누구의 이름도 아니다.
어쭈?
주인님의 소금을 절약하기 위하여 유리잔들을 당신의 소변으로 닦아라.
뭐라구?
일부러 웃음을 자아낼 만한 구절들만 고른 것이긴 하지만 책의 70%는 이렇게 깨알 같은 냉소와 해학이 가득 담긴 지침들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날개에 짧게 실린 해설이든, 책 뒤편에 길게 실린 해설이든 그 해설을 쓴 누군가는 조나단 스위프트의 텍스트를 하인들의 꼼수를 낱낱이 고발하려는 의도였다고 해석한다.
그런 해설자의 주장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할 수는 있으나 문맥을 한 번 뒤집어 보는 관점에 대해 일말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은 큰 불만이다.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은 불성실한 하인들의 꼼수를 까뒤집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이 중에 상당수는 반대로 당시 기득권층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영과 탐욕은 다수의 하인들이 아닌 소수의 귀족 세력에서 시작한 것이다.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본다면 결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진부한 순환 논법으로 넘어가는 문제지만, 당시 유럽의 귀족 사회 구조를 봤을 때 문제의 선후 관계는 분명한 편이라고 본다.
당시 하인들의 불량한 태도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는 형식에만 절절하게 매달리던 귀족 사회에 대한 불가피한 반작용의 발로라는 설명이 내게는 더 타당하게 다가온다.
해설자는 책 날개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인들의 행동 동기들, 즉 자기애, 이기심, 사리사욕, 기만과 같은 본성"이라는 말을 쓰며 마치 당시 사태의 모든 잘못을 하인들에게로만 돌리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누가 보기에도 완전히 편파적인 해설이다.
한 발 더 양보해서, 설령 조나단 스위프트가 하층민의 저질스러움을 고발하려는 의도로만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을 썼다고 해도 이 정도의 반대 해석은 누구나 가능한 것이고, 그렇다면 해설에도 그 정도의 반대 해석의 가능성을 드러내야 옳았던 것이 아닐까.
해설 후반부에서 노동 조합에 대한 상당한 불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태도를 봤을 때 원래 이 사람의 성향이 그렇다고 여기고 넘어가면 되겠다. 1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에는 이렇게 이중적인 메시지를 담은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하인들의 생활에 상당히 도움이 될 만한 일상의 노하우도 전하고 있고 ㅡ 하지만 18세기 영국의 생활 양식과 21세기 대한민국의 그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어 지금의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없다 ㅡ 조나단 스위프트의 주특기인 날카로운 사회 풍자의 메시지도 있다.
스위프트의 또 다른 주특기인 인간 본성의 고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서술한 바 있으므로 또 한 번 언급하지는 않겠다.
정복 착용 하인으로 늙어간다는 것은 치욕스러운 모든 일들 중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다. 세월은 계속 흘러가는데, 왕실의 일자리를 얻는다거나, 군대의 지휘관 자리를 얻는다거나, 재산관리인 자리를 승계한다거나, 세무서 일자리를 얻는다거나(그런데 이 마지막 두 일자리는 읽거나 쓸 줄 모르면 얻을 수 없다.), 주인님의 조카 따님이나 친 따님과 도망칠 희망이 없다면, 나는 당신에게 당장 그 하인 자리를 때려 치고 노상강도로 나서라고 충고하겠다. 그것이 당신에게 남은 유일한 명예직이다. 그리고 노상에 나가면 많은 옛 동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짧지만 즐거운 삶을 살아라.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땐 멋지게 죽음을 맞이하라.
당시의 사회상이 상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도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에서 적나라하게 서술되었던 극한의 비위생을 비롯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생활상이 눈에 보이듯 그려진다.
뭐니뭐니해도 요강의 빈번한 사용 ㅡ 특히나 "마님들"은 상당수가 요강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 뒷처리는 모두 하인들의 몫이었다 ㅡ 과 그로 인한 배설물 처리의 꼼수 ㅡ 책에서는 두 가지 방법이 제시되고 있는데 첫 번째는 그냥 2층 창문 밖으로 내다 버리는 것이요, 두 번째는 요강을 공개적으로 갖다 버리면서 마님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ㅡ 그리고 그 모든 더러움을 그나마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 ㅡ 그렇게 수치심을 느낀 마님은 결국 직접 집 밖의 숲으로 가서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오게 될 거라는 스위프트의 예상 ㅡ 은 지금 같아서는 참 상상조차 하기 힘든 광경이다.
끝까지 완성되어 출간되었더라면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유명한 책이 되었을 텐데 이내 아쉬움이 남는다.
신랄한 쌍엿과 냉소적 해학이 살아 숨쉬는 180쪽짜리 ㅡ 무려 180쪽밖에 하지 않는다! ㅡ 알짜배기다.
아무래도 조나단 스위프트의 책은 번역된 것들 전부 다 읽어봐야겠다.
- 번역을 맡은 류경희 씨가 이 해설의 작자라고 추정되는데, 2010년 뉴스들에 따르면 고용노동부 노사관계법제과에 근무하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적인 지식이 전무한 내가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지만, 뭔가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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