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Army) <Dora>

| 2012. 5. 5. 00:30

처음에는 네이버 뮤직 앱에서 미 육군의 육군가인 'The Army song'을 검색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정관사 the를 빼고 army를 입력했다.
네이버의 똑똑한 자동 완성 기능이 발동되었고 녀석은 "아미(Army)"라는 검색어를 가장 위에 띄웠다.
처음 검색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떠나 한 번 눌러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무시무시한 매력의 검색어.

검색의 결과는 더 충격적이었다.
네이버가 보여준 검색어는 아미라는 대한민국의 밴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름으로는 단 하나의 앨범이 달려 있었는데 바로 2010년 6월 8일 발매된 <Dora>라는 이름의 EP 앨범이 그것.
총 5개의 트랙이 수록되어 있다.
"아미(Army)"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이끌린 나의 손가락은, 좌측 상단의 전체 선택 버튼으로, 그리고 하단의 바로 듣기 버튼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움직여갔다.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을 때 받았던 충격은 가히 원자폭탄의 그것과 맞먹는 것이었다.

의미심장한 부분이 한 두개가 아니다.
밴드의 이름인 아미부터, 2차 세계대전에 사용되었던 역사상 가장 큰 대포의 이름인 "Dora", 그리고 전형적인 미국식 상업적 전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인 아버지의 깃발들 앨범 커버까지, 이들의 정체성을 어떤 식으로든 전쟁이나 군대와 관련 지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소들이 가득하다.
커버를 유심히 살펴본 나는 아마 아미의 음악적 장르가 극심한 하드 코어나 익스트림 메탈류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도 나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예상을 했거나, 최소한 다른 예상을 했더라도 나의 예상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미의 음악은 정말 그 어떤 예상의 여지조차 주지 않은, 대한민국에서는 정말 찾아보기 힘든 서던 락, 컨트리 블루스였다.
이 정도만 해도 원자 폭탄의 절반 어치 충격은 주는 것이다.
나머지 절반의 충격은 고작 20대 초반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이렇게 제대로 된, 아주 어센틱(authentic)한 컨트리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정석적인 컨트리 기타 리프와 이어지는 슬라이드 기타의 향연, "Let's burn it up."이라는 문구가 주는 깔끔한 식감 등이 허술한 듯 튼튼하게 짜여진 인트로 트랙 'Wild horse'.
가사의 영작 실력을 봤을 때 평범한 김치맨들은 아닐 것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있으나 중간에 나오는 맛깔나는 기타 솔로나 후반부의 완급 조절 등을 고려하면 이들의 성장 배경이 대한민국이든 미국이든 상관 없이, 어린 나이에 이런 내공을 갖췄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게 된다.
네이버 뮤직에 따르면 타이틀 곡으로 표시되어 있는 'Girl in my pocket'은 인트로의 하모니카 소리에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트랙이다.
깨알 같은 박수 박자, 미니멀한 반주 구성이 주는 젊은 느낌, 새로운 바람 같은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무척이나 노련한 하모니카 연주가 대변하는 항상 뭔가에 쩔어 있는 카우보이 아저씨 같은 이미지가 극적인 조화를 이룬다.

제목부터 쌈빡한 인상을 주는 'Bang bang'은 여성 코러스를 적소에 삽입함으로써 빈티지함을 극대화했다.
하지만 이 트랙의 상징은 역시나 바이올린 세션의 가세인데, 깔끔한 바이올린 소리는 "Mr. Cowboy"라든지 "shoot you down"이라든지 "gun powder smell"이라든지 하는 가사들과 함께 어우러져 노래의 현장감 ㅡ 그러니까 19세기 후반 미국 서부, 이름은 왠지 무슨 홀스 타운(Horse Town)이나 웨스트 빙스턴이여야 될 것 같은 마을의 광장 정도랄까 ㅡ 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Train leaving lost it from in my sight'은 그 옛날에나 존재하던 기차 움직임만을 묘사하기 위한 음악의 일종이다.
규칙적인 드럼 비트와 베이스 리프, 거기에 기차의 기적 소리를 흉내내는 하모니카의 멋드러진 기교를 감상하면 칙칙폭폭 광야를 질주하는 빈티지한 기차가 연상되는 것은 당연지사.

앨범의 마지막 트랙 'Minefield'는 블루스를 좋아하는 내가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는 트랙이다.
자신을 지뢰밭에 비교하며 honey라고 표현되는 불특정 상대에게 조심조심 밟지 않으면 다치고,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주의해달라는 진부하지만 그 진부한 맛으로 즐길 수 있는 가사가 재미있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라이브 실력이 수준급이다.
3인조로 저 정도의 꽉찬 사운드를 내기가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느낌으로 소화해내고 있지 않나.
위에서 언급했던 군대와 관련된 미스테리들과 그나마 관련이 있는 듯한 제목도 맘에 든다.
하지만 여전히 저런 군대 드립을 EP 앨범으로 뽑아낸 것에 어떤 강력한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정말 하찮은 계기로 듣게 된 것 치고 아주 아주 훌륭한 앨범.

대체 이 정도의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밴드가 2010년 이후로 아무런 활동이 없다는 것은 너무 미스테리한 일이다.
검색을 통해 밴드의 팬클럽 페이지에 들어갔다.
리더로 추정되는 허세정이 2010년 12월 18일에 올린 "아미 활동 끝"이라는 공지를 보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미니홈피를 들어가보니 1987년생이더라.

활동을 시작한 것을 2009년이라고 치면 ㅡ 유튜브에는 2009년의 공연 영상이 올라와 있다 ㅡ 국제 나이로 22살의 남자들이 만든 음악이라는 뜻인데, 정규 앨범 한 장 내지 않고 화석이 되기엔 정말 안타까운 재능이다.
어떤 형태로든 다시 만나자고 하는 도전적인 청춘의 패기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길 바란다.
그냥 이렇게 사라져 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원석들이라고 생각할 그들의 적지 않은 팬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에요, 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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