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ow

| 2012. 5. 8. 16:41

글이 길어질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영화 <서약>은 내가 포스터로부터 유추했던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아니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라기보다는 은은한 로맨스가 흐르는 드라마 영화에 더 가깝고, 단순히 영화의 흐름에 신경을 맡기고 멍하니 보다가 크레딧이 올라가면 '오, 훈훈하다.' 따위의 멘트나 던지고 끝나는 영화라기보다 끊임없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마지막까지 영화의 엔딩이 어떤 식으로 끝나게 될지 단서를 주지 않는 나름 치밀하고 나름 중독성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오히려 단순히 발렌타인 주말, 또는 화이트 주말 ㅡ 말이 이상하지만 대충 화이트데이가 포함되어 있는 주말이라고 해두자 ㅡ 을 맞아 남자 친구,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가볍게 영화를 보려던 사람들에게는 약간 고개를 갸웃하게 할 영화고, 나 같이 그냥 시시한 감성 팔이 2류 연애이야기이겠거니 생각하고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의외의 만족감을 주는 영화라는 말이다.

극 중의 채닝 테이텀은 자꾸만 상의를 탈의한다. 사람에 따라 별도의 만족감이 추가되는 부분. http://movies.tvguide.com/the-vow/photos/339760/1209628

<서약>이 관객에게 던지는 묵직한 돌직구는 존재론적인 관점의 심오한 문제다.
자, 당신에게 배우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이 배우자가 어느 날 사고를 당해 당신과의 첫 만남을 포함, 그 이후의 기억이 아예 지워졌다면?
그렇다면 과연 그 배우자에게 있어 당신의 존재는 무엇이 되는가.
반대로, 당신에게 있어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 배우자의 존재는 무엇이 되는가.

이 때부터 두 남녀가 만들어내던 하나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분리된다.
여자는 거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사람처럼, 삶의 궤도가 한 번 크게 어긋나기 전의 아주 딴판인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녀의 삶은, 마지막 기억이 남아 있는 과거의 시점 이전의 추세선에 맞춰 그 때의 그녀에게 익숙한 삶과, 그녀 자신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가장 최근에 그녀가 살았던 그 삶의 갈림길 사이에서 존재의 위기를 맞게 된다.
남자의 경우는 어떤가.
일생의 한 사람이라고 바로 어제까지 생각하던 그녀와의 관계가 한 순간 만에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상황이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그러한 관계의 단절이 일방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
삶의 반쪽 덩어리가 하루 아침에 떨어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 남자 역시 실존적 위기에 처한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대체 무슨 생각이 들겠냐는 것이다. 한국판 <서약>의 현장.

이처럼 영화 <서약>은 아주 생소하고 낯선 상황에 관객을 대입시킴으로써 적지 않은 충격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한다.
솔직히 영화의 중반부까지 나는 영화를 계속 보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불편했다.
이는 어떤 심정적인 충격에 대해 스스로의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 대체로 불안해하는 ㅡ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리면 그보다 더 편안해질 수는 없는 ㅡ 나의 개인적인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나와 영화를 같이 봤던 채닝 테이텀을 좋아하는 그 사람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니 어느 정도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기억의 유무에 따라 우리네 존재의 의미라는 것이 이토록 쉽게 흔들리는 생소한 풍경에 적응하기까지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영화는 중반부 이후부터 아주 천천히, 두 상처 받은 존재가 각자의 문제점과 한계를 인식하고 자신이 처했던 위기에서 스스로를 구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태에 접어들었을 무렵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가상의 첫 번째 엔딩이라고 본다.
뜬금없이 터지는 극적인 사건이 영화의 흐름을 한순간에 뒤바꾸는[각주:1] 부분부터는 그 첫 번째 엔딩 뒤의 이야기, 속편 같은 느낌이다.
이야기 전개의 속도가 걷잡을 수 없게 빨라지는 부분에서는, 설마 설마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하지만 <서약>은 이런 류의 드라마 영화가 아주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억지스러운 감동 쥐어 짜내기"의 클리셰에 빠지지 않는다.
괜히 그런 불안감 때문인지 엔딩이 도대체 어떻게 끝날 것인지 정말 마지막까지 예측하기가 힘들었는데, 현실적으로 최대한 무덤덤한 엔딩 장면을 보여주면서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을 관객 각자의 몫으로 돌린다.
시작부터 끝까지 다 떠먹여주는 식의 스토리 텔링이 아니라서 좋다.

엄청나게 대단한 영화는 아니지만 그저 발렌타인 시즌의 로맨스 영화 정도로 취급하기엔 아까운 영화다.
1978년생 레이첼 맥아담스는 뭔가 예전의 포스를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크고 아름다운 몸을 가진 채닝 테이텀은 현실적인 얼굴 외모를 무기로 삼아 좋은 커플 연기를 보여줬고.
왠지 채닝 테이텀이 레이첼 맥아담스를 "다시" 꼬시는 과정에서 자꾸 자신의 크고 아름다운 상체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보여, 내 배를 한 번 내려다보고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었지.
그 외에는 뭐가 있을까, 레코딩 스튜디오는 사향 산업이라는 것 정도?

이 쯤에서 글을 마친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한 것 같네.

세 줄 요약 :
1. 좋은 영화다.
2. 차에서 야한 거 하지 말자.
3. 운동하자.

  1. 사실은 애초에 기억 상실로 인한 존재의 위기가 찾아왔던 이유가 같은 사건으로 인해 여자의 삶이 근본적인 전환을 맞았다는 것에 있기는 하다. 만약 여자가 꾸준하게 비슷한 삶을 살던 도중 이런 일을 맞았더라면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이 이 정도로 드라마틱할 수는 없는 일. 혹시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합심하여 여자의 기억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말 그대로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될 수 있었으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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