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으로 봤을 때, 내가 봤던 적지 않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중에 가장 훌륭한 책 표지를 가지고 있지 않나 싶은 작품.
딱 봐도 세일즈맨처럼 생긴 한 남자의 의미심장한 미소는 처음에 볼 때는 단순히 알프레드 히치콕 풍의 기괴함만을 떠올리게 했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긴 뒤에 다시 봤을 때 밀려오는 잔잔한 충격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극 문학의 텍스트적 한계가 단 한 컷의 실사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 쪽 분야에 있어 나의 식견이 좁다는 하나의 방증이 되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대본을 읽기 보다는 직접 공연을 봐야 만족하는 한 명의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인 것 같다.
사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다지 큰 감정 이입을 할 수가 없었다.
현실과 몽상 사이에서 자아의 실존적인 위기를 ㅡ 이런 작품들이 대개 그렇지만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도 역시 이런 실존의 위기는 현실 속에서 실체의 위기로 심화된다 ㅡ 겪고 있는 주인공들은 도무지 내가 이성적으로 바라보기도, 감정적으로 공감해주기도 참 힘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몽상이라는 키워드로 연결하자면 영화 <몽상가들>의 남매 캐릭터에게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반 우스갯소리로 그 남매의 문제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라면, <세일즈맨의 죽음> 속 세 부자의 문제는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과 결부된, 성공에 대한 집단적인 트라우마와 큰 관점에서는 일상적이나 당사자들에게는 일상적이지 않은 소소한 가족사가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고상한 척하는 표현을 다 버린다면, 그냥 거의 정신 착란 상태에서 매일을 살고 있다고 표현해도 무방한 정신 병자들의 이야기다.
아들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이가 젊어서 일을 잘할 때는 회사에서 좋아들 했지. 그이를 아껴 주고 어려우면 늘 주문 넣어 주던 친구들이나 바이어들이 이제는 모두 죽거나 은퇴했어. 예전엔 보스턴에서 하루에 예닐곱 회사를 다니며 판촉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샘플 가방을 차에서 꺼냈다가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냈다가, 그러니 피로할 수밖에. 사람을 찾아다니는 대신 요즘은 말로 때우지. 1100킬로미터를 달려서 가도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반겨 주는 사람도 없어. 동전 한 푼 벌지 못한 채 다시 1100킬로미터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들 것 같니? 그러니 왜 혼잣말을 하지 않겠어? 당연하지 않니? 찰리 아저씨네 가서 50달러를 꾸어서는 마치 자기 봉급인 것처럼 내게 내밀 때 어떤 생각이 들겠니? 언제까지 이렇게 갈 수 있을까? 과연 언제까지? 내가 여기 앉아 뭘 기다리는지 알아? 그러고도 성격이 이상하다고? 평생 너희를 위해 일한 사람에게 할 소리냐, 그게? 너희가 금메달을 걸어 드려야 하는 것 아니니? 이게 그 보상이냐? 나이 예순셋에 돌아보니 목숨보다 사랑했던 아들 하나는 바람둥이 놈팡이에…….
굳이 이 이야기의 시대적 상황을 우리 나라에 적용시켜 보자면 IMF를 전후로 하는 시기를 그 배경으로 꼽을 수 있겠다.
대한민국 경제사에 있어 가장 큰 파장을 부른 사건 중의 하나였던 그 격변기에 간접적으로도 그 변화를 몸소 체험하지 못한 나이기에 더욱 이 세계적인 히트작에 공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1
삶이 무너져 내리는 수준의 실패, 그리고 그 처참한 패배감에서 기인하는 트라우마와 무기력감 같은 것을 겪게 되는 날엔 아마 무릎을 치며 아서 밀러의 치밀한 필치에 공감하게 될지도.
이 작품이 그에게 단숨에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것과 상반되는, 이 정도의 평밖에 내릴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나의 무지식과 몰이해 탓이다.
진부하기 그지 없는 정리를 하자면, <세일즈맨의 죽음>은 연극으로 봤을 때 훨씬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아서 밀러의 메시지를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물론 이 추상적인 텍스트가 연극이라는 실체적인 예술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연출자나 배우들의 주관성이 섞여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순 없겠지만, 시공간을 입체적으로 뛰어넘는 현란한 구조나 문자와 기호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등장 인물들의 감성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공연이 답이다.
절대 나의 텍스트 해석 능력이 떨어져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근데 내가 스스로 연극 따위 보러 갈 일은 없을 거잖아?
그래서 표지 스틸 컷이 담긴 동명의 영화라도 구해서 볼 생각이다.
아마 이마저 조만간 영원히 잊혀질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한 순간에 읽을 거리에서 짐짝으로 변신한 <세일즈맨의 죽음>.
- 단어가 애매모호해서 정리를 하자면,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나이(age)가 아니라 나(I, myself)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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