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 Lenny Kravitz Black And White Korea Audi Live 2012 전기
긴 말 할 것 없이 최고의 공연이었다.
정돈된 글을 쓰기 힘들 정도로 흥분의 도가니였기 때문에 틈틈이 적어둔 메모를 기반으로 평을 쓴다.
사진 같은 거 어차피 제대로 찍을 생각 없었다.
1. 새로운 관계 설정
인트로 세 곡을 쉴 틈 없이 달린 뒤 레니는 공연의 첫 멘트를 던졌다.
그 멘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This is the beginning of a beautiful relationship!"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겨 따로 메모까지 해두었다.
이 첫 번째 내한 공연이 나와 너의 아름다운 관계가 시작되는 계기라니, 이렇게 달달한 말을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게 던질 수 있었을까.
여태까지 여러 번의 내한 공연을 다녀왔지만 단순히 관객과의 호흡을 중요시하던 다른 뮤지션들과는 달리, 레니는 관객과 자신, 그리고 자신의 밴드를 구체적인 하나의 관계라는 끈으로 묶어냈다.
이 콘서트 장은 너희들의 집이고 우리는 손님으로서 여기에 공연을 하러 왔으니 즐기는 것은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식의 멘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물론 그 누구도 노골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보통의 공연, 특히나 내한 공연 같은 경우, 공연의 주체인 뮤지션은 우리가 떠받들어야 하는 신이요, 군주로서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레니는 이 암묵적인 주종 관계를 자신이 직접 뒤집으면서 관객들과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다.
이런 관객 섬김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공연 중의 무대 매너로 이어졌다.
떼창을 유도할 때도, 박수를 유도할 때도, 그의 자세에서는 "자, 빨리 이렇게 해다오!"하는 명령이나 요구가 아닌 부탁과 권유의 뉘앙스가 짙게 느껴졌다.
공연이 끝나갈 무렵, 꼭 다시 한 번 자신을 "초대"해 달라고 얘기하는 모습에서도 이와 같은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앵콜곡 "Let love rule"의 전무후무한 퍼포먼스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관계가 전제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세계적인 뮤지션을 떠나 하나의 인간으로서도 참 귀감이 되는 모습이다.
2. 원곡에 충실하지만 효율적인 편곡
어느 정도 스튜디오 버전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라이브 무대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앨범 버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편곡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내한 공연에서 느낀 레니의 편곡 방향은 ㅡ 투어의 형식이나 공연 당일의 컨디션 따위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ㅡ 원곡에 최대한 충실한 어레인지를 하되, 최소의 변화로 최대의 결과를 이끄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금방 인터넷에 돌아다닐 줄 알았던 공연 셋 리스트가 아직 없어서 모든 곡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겠고, 내가 메모해 둔 트랙들만 짧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Come on and get it'은 원곡에서보다 신디의 비중을 늘렸는데 거의 히트 팝에 버금갈 정도로 트렌디한 곡이 튀어나왔다.
'American woman'은 기타 리프와 드럼 비트의 무게감을 더해 훨씬 락에 본질에 다가선 곡으로 탈바꿈시켰고,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Black and white America'는 대체 어디서 유래하는지 알 수 없는 그루브감이 곡 전체를 지배했다.
"One of favorites"라고 표현했던 'Fields of joy'는 후반부의 폭발하는 감성을 원곡보다 훨씬 더 극대화하여 거의 레드 제플린의 재림을 보는 듯 했으며, 'Stand'는 완전한 AC/DC 풍의 80년대 하드 락으로 변신시켰다.
전반적으로 혁신적인 편곡은 없었으나 충분히 스튜디오 버전과는 차별화된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어쿠스틱 기타부터 플라잉 브이까지 깁슨만을 고집하던 레니의 기타 실력은,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나중에 나오면서 저 거대한 천막에 적힌 "Audi"라는 단어를 못 봤더라면 아우디 프로모션이 공연의 일부로 끼어 있었음을 잊을 뻔 했다. 재밌게도 이번 공연에서 아우디 프로모션은 완전히 뒤로 빠져 있었는데 ㅡ 공연장 입구 한 편에 부스를 차려놓고 있었다 ㅡ 관객 입장에서는 더 쾌적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나 싶다.
3. 놀라운 팀 워크
레니는 이번 월드 투어차 내한 공연에 "당연히" 투어 멤버들을 모두 데려왔다.
뉴시스의 기사를 잠시 인용한다.
이날 공연을 빛낸 또 다른 주인공들을 세션이었다. 즉흥연주인 '잼(Jam)'에 능숙한 7명의 밴드 멤버가 무대에 올랐다. 이 중 데이비드 보위 밴드의 홍일점 베이시스트 게일 앤 도우시, 1991년부터 크라비츠와 함께 했으며 비비 킹·에릭 클랩턴과 연주한 기타리스트 크레이그 로스, 리듬감 넘치는 연주가 장기인 드러머 프랭클린 밴더빌트가 뛰어났다. 트럼펫·트럼본·색스폰 등 브라스 3인방은 사운드를 풍성하게 만드는 주역이었다.
이번 공연에서 또 하나의 눈 요기가 있었다면 이 개성 넘치는 세션맨들의 현란한 솔로였다.
스튜디오 버전에서는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던 숨겨진 솔로들이 제각각 빛을 발했다.
레니는 세션의 솔로가 있을 때마다 직접 그 솔로의 현장을 찾아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유도했는데, 그 모습에서 멤버 하나 하나를 세세하게 챙겨주는 책임감과 배려심이 엿보였다.
이렇게 세션이 하나 하나 인상 깊게 기억되는 공연도 또 처음인 것 같다.
레니 크라비츠식 집중 케어의 결과.
이미 2월부터 같이 투어를 돌기 시작한 멤버들인 만큼 그 탄탄한 팀 워크가 뿜어내는 시너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장르 구분이 모호한, 다르게 말하면 각종 장르들의 콜래보레이션이 이루어진 레니의 음악 특성상, 또는 "Black and white America"라는 이번 투어의 구호상 흑인과 백인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내가 본, 밴드가 아닌 개인의 이름을 단 팀의 공연 중에 단연 최고의 세션 팀이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4. 결과적으로 정말 뛰어난 공연
실내 체육관으로 가는 길에 느꼈던 것은 생각보다 여성 관객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었다.
인터파크 예매 정보를 확인하면, 거의 남녀 성비가 1:1로 나오는데 레니 크라비츠가 기본적으로 락 사운드를 추구하는 뮤지션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여초라고 해도 괜찮을 만한 성비였다.
특히나 30대에서 40대로 보이는 여성 관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생각보다 높은 여성 관객의 비율과, 대한민국 30대, 40대 여성의 높은 참여는, 마룬 5 내한 이후로 들었던 함성 중 가장 높은 데시벨의 그것을 내게 들려주었다.
앵콜 공연 전 마지막 곡이었던 'Are you gonna go my way'가 끝나고 터져나온 함성.
귀가 먹먹해져서는 대체 이게 사람의 무리가 낼 수 있는 소리인지 분간이 안 가는 그 아수라장.
분명히 레니와 그 팀에게도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으리라.
멘트가 거의 없음에도 상당히 긴 호흡의 공연이었다.
한 마디쯤은 짧은 우리 말 인사를 준비해왔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유창한 영어 멘트를 구사했다.
생각보다 흑인 액센트가 섞여 있지 않은 그의 영어는 꽤 들을 만 했다.
1989년 그의 데뷔 앨범이 나오던 해의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음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당시에 하던 자신의 생각이라고.
'Let love rule'을 앵콜 마지막곡으로 하기 위한 스끼다시의 이야기였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레니가 직접 들려주는 레니의 이야기는 꽤 뼈가 있었다.
그의 음악은 단순하게 들리는 편이지만, 끊임 없는 고뇌와 쇄신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결코 지금의 레니는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 혁신적인 이미지를 꾸준히 유지해주길.
5. 공연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안 끝났으면 하는 공연은 처음이었다.
빨리 한국에 또 나타나주세요, 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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